커피 한잔

매일 한 잔의 커피를 위한 도구

by 율리

커피를 좋아한다. 산미가 강하지 않으면서, 다크한 원두에, 우유 거품이 풍부한, 그렇다고 우유가 많지 않은 라테, 정확히 말하면 플랫화이트에 가까운 그런 커피를 좋아한다. 요즘은 여기에 시나몬 가루를 살살 뿌려보기 시작했다.


회사에 출근할 때면, 늘 건물 지하 커피숍에 들른다. 일반 프랜차이즈에는 플랫화이트가 잘 없기 때문에, 카페라테를 시키되, 우유 양을 '많이' 줄여달라고 말한다. 회사생활 약 10년 동안 늘 우유가 적은 라테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임신을 했을 때에도 하루 한잔 커피는 괜찮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 덕분에 커피 모닝은 멈추지 않았다. 아! 수유를 하던 8개월 동안은 정말 눈물을 머금고 커피를 끊었었지만. (개인적으로 출산의 고통보다 먹는 자유가 제한되던 수유기간이 더 고통스러웠다.)


육아휴직을 건너, 재택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4년 전 구매한 캡슐커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동시에 전자레인지에서 우유를 데운다. 그렇게 완성된 라테는 텍스트만큼 간단하지만, 정말 별로다. 커피를 마셨지만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오묘한 그리움을 부른다고 할까.


지속되는 결핍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법. 그렇게 집에서도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나 둘 크고 작은 도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잔의 커피를 위해, 유쾌한 하루의 시작을 위해.

도구 1. 커피머신

캡슐커피가 아직 멀쩡한 기계였기에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먼저 우유 거품기를 샀다.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우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맛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우유에 캡슐이 만들어 준 에스프레소를 담는다.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캡슐로 담기엔 나의 커피 욕심이 컸다. 이 기계의 브랜드 스토리(what else? 카피 정말 최고!)를 좋아하던 터라 새로 나온 머신을 사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정작 이 머신과 작별하고 싶었던 결정적 이유는 ‘캡슐’에 있었다.


형형색색 쌓여가는 캡슐들. 매번 매장에 가서 재활용을 위해 반납 하긴 하지만, 정말 제대로 재활용이 될지 의심스러웠다. 설사 제대로 된다 하더라도 줄일 수 있다면 줄이면 좋을, 환경적이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쓰레기이기에 최대한 줄여보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그렇게 캡슐커피를 새로운 주인에게 전달하고, 원두를 활용할 수 있는 기계를 골랐다. 마음 같아선 조금 비싸더라도 글라인드 기계, 커피 내리는 기계를 따로 살까도 싶었다. 하지만 경제적인 판단 하에, 원래 사려던 캡슐커피 업그레이드 버전 가격대와 비슷하고, 원두도 직접 갈 수 있고,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까지 자동으로 추출되는 기계를 골랐다. 외형이 많이 투박하고 몸집이 크다는 게 단점이 있었지만, 1년 넘게 쓰고 있는 지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으리라 자부한다.

우유거품기 & 듬직한 나의 커피머신



도구 2. 원두

커피는 맛만큼이나 향이 중요하다. 향으로 마신다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보통 커피가 내려질 때에 강하게 퍼지는 향이 우리가 기억하는 커피의 대표적인 후각이다. 하지만 커피 한잔이 되기 전 로스팅된 원두를 만날 수 있다면, 또 하나 몰랐던 향을 알 수 있다. 고심히 고른 원두를 담아 처음 포장지를 열었을 때, 입가에 저절로 번지는 미소가 진짜 커피 향의 시작인 것이다. (간혹 로스팅한 지 오래되거나, 나와 맞지 않은 향을 만나기도 하는데 냄새도, 맛도 별로이긴 하다)


원두의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감을 시작으로, 공기를 가득 덮는 강한 커피 향이 완성된다. 그렇게 시작된 후각은 그대로 은은하게 입안으로 이어져 미각을 깨운다. 요즘은 마지막에 시나몬도 뿌려본다. 커피와 시나몬이 만나면 달콤한 경험이 덤으로 온다.


시끄럽고, 다소 요란하게 갈리는 원두는 커피의 소임에 충실함과 동시에 그다음 쓰임새도 다양하다. 물기를 머금은 원두찌꺼기를 바싹 말린 다음, 냉장고, 신발장, 화장실, 옷장, 다용도실 등 에서 습기와 냄새를 잡는 용도로 쓴다. 마지막은 식물들의 천연비료로도 사용한다. 편리함으로는 캡슐커피를 따라갈 수 없겠지만, 생각을 바꾸고 알지 못했던 감각을 경험하고, 한 발짝 한 발짝 해보고 싶었던 Green Life를 생각하니 불편함도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원두향도 커피맛도 취향 저격한 아이 :)
원두찌꺼기의 다양한 활용



도구 3. 커피잔

10년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커피다. 바티칸 성당 안 식당에서, 콜로세움 근처 카페에서, 리알토 다리 밑에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 맛은 말할 것도 없지만, 지금껏 내가 마셔왔던 커피와 양과 컵이 달랐다. 지금이야 플랫화이트 같은 커피들이 작은 유리컵에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늘 프랜차이즈의 종이컵이 커피가 담기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배가 부를 만큼의 많은 양과 함께. 이탈리아 곳곳에서 손잡이가 없는 유리잔에, 평소 마시는 양에 반도 안 되는 커피를 마시며, 커피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유리컵에 담긴 커피. 유리잔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온도를 담아 짧은 시간 동안 커피에 온전히 집중했다. 커피의 온기가 온몸에서 퍼질 때 즈음, 주변을 둘러보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유리잔에 남겨진 거품이 참 예뻤다. 평소 누렇게 변한 종이컵 속에, 가득 남겨진 식은 커피의 아쉬운 모습과는 또 다른 마무리였다.


유리컵의 라테. 그 기억을 되살려 나의 커피를 위한 유리컵을 마련한다. 평소에는 물도 담아 마시고, 커피도 담아 유럽의 감성도 더듬어보고. 여간 유용할 수 없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하루치 카페인, 유제품 섭취량에 부담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오후의 커피를 또 마셔도 되겠다는 대한 안도감도 가져본다. 꽤 느낌 있는 사진은 덤.


새삼, 어느 날 아침. 햇살에 내리쬐는 커피 한잔을 바라보고 있자니 잊고 있었던 생각이 찾아온다. 나의 행복을 위해, 하루 시작을 위해, 한잔의 커피를 위해 각자의 시간에서 역할을 다해주는 고마운 나의 도구 친구들. 그들의 쓰임에 의미를 담아 과정을 곱씹어 글로 남겨보니, 고마움도 밀려온다.


매일 밤. 주방에서 커피머신을 닦고, 원두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꼭 잠긴 지퍼를 다시 눌러본다. 식기세척기에서 유리컵을 꺼내 찬장에 올려둔다. 우유 거품기 옆에 시나몬을 올려두고 슬며시 혼자말처럼 모두에게 들리게 말해본다. 내일도 잘 부탁한다고.

:)


<매일매일 도구도구>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선택해, 나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도구들이 가진 본연의 역할,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저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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