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지구를 위해 다시 비누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조향사가 나온 TV 프로그램을 보았다. 기억에 남는 조향 의뢰인이 있냐는 말에, 첫사랑의 향을 만들어달라는 어떤 중후한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첫사랑의 향... 얼마나 기억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간직하고 싶었던 첫사랑의 향을 병에 담아 보았더니, 그 향은 다름 아닌 바로 어떤 회사의 "샴푸"향이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기억에 각인될 만큼 은은하게 풍기는 샴푸향.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도 샴푸향이 나고, 그녀는 나의 샴푸의 요정이라는 노래가 불릴만한 강렬한 존재.
그러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샴푸향은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꽤나 늦게 샴푸를 썼다. 유독 비누를 좋아했던 엄마는 샴푸를 잘 사지 않으셨다.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줄곧 비누로 머리를 감았다. 세탁기, 양변기, 샤워기, 세면대로 꽉 차 있었던 파란 타일의 욕실 (세탁실? 욕실? 화장실? 뭐라고 불러야 하나... 오늘은 욕실이라 불러본다) 문을 열면 바로 앞 샤워기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세면용품들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늘 분홍색 비누통 안에 초록색 비누가 놓여 있었다. 그 작은 존재는 화장실 문을 열면 그 공간의 냄새를 압도했다. 그 이름, "오이비누"
이름을 떠올리는 순간 그 향이 밀려온다. 그때는 참 그 냄새가 싫었다.
어느 날 유난히 얼굴이 하얗던 친구가 내 앞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묶는데 향이 밀려왔다. 순간 "야 너 무슨 비 누써?"라고 물었는데, 그 친구가 약간의 비웃음과 새침함을 한 스푼 넣어 나에게 말했다. "나 샴푸 쓰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선가 오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그 길로 엄마에게 오이비누를, 다시는 비누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대 시절, 집을 떠나 오직 내가 쓰기 위한 샴푸를 고를 수 있는 권한이 생겼을 때, 빨래비누 외에는 그 어떤 비누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꽃향이 나는 샴푸, 베이비파우더 향이 나는 바디워시까지. 움직일 때마다 좋은 향이 나길, 나도 샴푸의 요정이 되고 싶어 스스로 참 많이 발버둥 쳤었다. 가끔 누군가 나에게 무슨 샴푸 써? 향 너무 좋다 라고 말하면, 어쩜 그렇게 으쓱했는지 모르겠다.
2020년. 나는 길고 길었던 샴푸에 안녕을 고했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아지던 때.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이 생각은 더 이상 걱정뿐이 아닌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알았다. 그리고 책과 SNS를 통해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리스트업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비누 사용"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의"샴푸"를 비롯한 플라스틱 용기들에게 안녕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별의 순간, 좋았던 향의 기운만큼이나 내가 몰랐던, 불편한 진실들을 하나하나 알게 되니 안녕은 그리 힘들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강렬한 향을 남겨주는 샴푸는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을 사용한다. 그래도 요즘은 유기농, 천연, 계면활성제를 사용하지 않는 샴푸가 많이 나오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성분이 액체가 되기 해서는 방부제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분을 떠나, 액체는 플라스틱에 담겨 소비자들에게 도착한다. 플라스틱은 태생이 화학이다.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액체는 미세한 플라스틱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바다로, 강으로, 공기로 화학제품이 발생하게 되고, 본인의 역할을 다 하고 나서도 긴 시간을 바다에, 흙에서 머물게 된다. 흔히 마시는 생수, 샴푸, 바디클렌저 등 우리는 매일 그렇게 조금씩 플라스틱을 몸에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수많은 플라스틱들. 이미 우리는 작별을 고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들어와 있다. 다만 지난 세월의 무지를 후회하기엔 또 우리에겐 앞으로의 많은 시간이 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샴푸를 쓰지 않았다. 샴푸를 비롯해 트리트먼트, 세안제, 바디워시 심지어 치약까지 플라스틱 안에 들어있는 것들과 하나씩 작별을 했다. (물론 미리 사둔 제품들은 모두 사용했다!)
요즘은 비누로 샴푸, 트리트먼트가 모두 잘 나온다. 거품도 잘 나고, 샴푸까지는 아니지만 향도 있다. 딸아이도 아이 전용 비누 하나로 머리, 몸을 씻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늘 머리에 나는 뾰루지로 고생하며 피부과도 다녔었는데 이제는 거의 나지 않는다. 그때 원인이 스트레스 혹은 샴푸 잔여물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잔여물이 이제야 없어졌나 보다 싶다.
내 머리카락에서는 이제 더 이상 꽃향기가 나지 않는다. 대신 덕분에 내 몸에, 자연에 남는 플라스틱을 줄이고 있는 중이다. 오래 남을 향기는 줄었지만 꽤 괜찮은 사람 냄새를 풍기려고 말이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나중에 딸아이가 예전의 나처럼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를 원한다면 어쩌나 싶다. 하루빨리 강렬한 향 대신, 은은한 비누향과 자신과 환경을 돌볼 줄 아는 본인의 향기가 첫사랑의 향으로 남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그게 어렵다면, 천연 오일로 만든 향을 머리에, 몸에 조금씩 발라주는 것도 방법이겠다 싶다. 환경도 소중하고 향에 대한 추억도, 로망도 소중하니까.
<매일매일 도구도구>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선택해, 나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도구들이 가진 본연의 역할,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저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