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세척기가 필요하냐고 물으신다면, 답해드립니다
나는 식기세척기 7년 차, 워킹맘이다. 만삭일 때 12인용 식기세척기를 과감하게 들였다. 가끔 "써보니 어떠냐, 추천하냐"는 질문을 받은데, 대답 속도 0.1초.
“무조건입니다”라고 답한다.
화려한 음식 솜씨는 없지만 나름 8년 가까이 구축해 온 '나의 키친 라이프'에 식기세척기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늦은 밤. 친구의 카톡이 왔다. 그녀는 식기세척기 2년 차, 동병상련 워킹맘이다.
‘통화 가능?’
휴대폰을 챙겨 조용조용 옷방으로 걸어 가 전화를 건다. 친구의 첫마디는 강렬했다.
“야! 나 식세기 없었으면 진짜 이혼했을 거야!”
“헐 왜??”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늘 있었던 일을 래퍼처럼 쏟아낸다.
'퇴근해도 직장. 끝나지 않는 육아. 도와주기는커녕, 어느샌가 큰아들이 된 남편. 일하랴 육아하랴 살림하랴.' 많이 들어본 듯한 가사와 착착 감기는 라임. 강렬한 인트로를 거쳐, 익숙한 벌스를 지나, 이 강력한 hook으로 랩이 끝났다.
“정말.. 식기세척기는 혁명, 없었으면 이혼각.”
그녀의 이혼을 막고, 가정의 평화를 지켜주는 식기세척기. 친구가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할 때쯤,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다 필요 없고, 식세기를 들이라' 조언했다. 그 말은 여럿에게 전파되어 고마움과 깨달음을 주고 있다.
나에게 식기세척기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우선 이것은 내게 생소한 신문물이었다. 한국인 밥그릇 특성상 깨끗이 닦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쉽게 들이기엔 주방에 비해 몸집이 커 보였다. 이걸 사야겠다 생각하지도 않았고, 누군가 사라고 권한 대도 웃고 넘길 그런 존재.
그런 나에게 유혹의 손을 내민 건 남편이었다. 그때 우리는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고, 맞벌이 부부의 숙명을 아무런 겁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혼 생활 1년 동안 나름 살림이라는 걸 해봤다. 특히 요리는 못하는데, 직접 내가 만들고 싶고, 설거지는 싫은데 그릇이 쌓이는 건 싫어했던 나를 보며 남편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나 보다. 어느 날, 그는 꽤나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 아이가 태어나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거야..(.........)
나중 되면 또 유기농이다 뭐다, 다 사서 요리할 거고..(.........)
손에 물 묻힐 일들이 많을 텐데, 수납공간은 조금 포기하더라도 우리 식기세척기 제일 큰 걸로 사서 넣자. 어때?”
손에 물 하나 안 묻힐 거란 약속은 애초에도 없었고, 해도 믿지 않았을 거다. 출산, 육아 역시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건강하게 낳기만 해’ 뭐 이런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줄 필요도 없었다. 가끔 보면 지나치게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남편이 정 없어 보이지만, 정색하며 논리적으로 말을 걸어오면 '아... 그런가 보다' 나는 또 설득당한다. 그렇게 냄비 30개는 들어갈 것 같은 큰 하부장을 없애고 식기세척기를 빌트인으로 넣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육아에, 일에. 나는 지쳐갔다. 남편 역시 일을 하고, 육아를 했다. (시키는 것들 위주...) 분명 같이 하는 건데, 나만 발을 동동 굴렸다.
아주 작게는 주방이 문제였다. 몇 번이고 마시는 물컵, 유리, 스테인리스 등 크고 작은 접시들. 집에서 거하게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늘 설거지거리는 쏟아졌다. 싱크대에 쌓여만 가는 그릇들은 내 마음과 같았다.
식기세척기가 있었지만, 즐기지 못했다.
'이거 몇 개 나왔다고 1시간 넘게 저걸 돌려? 내가 하고 말지.'
한바탕 육아가 끝나고 나면, 혹여나 아이가 깰까 조심조심 설거지를 했다. 세제를 퐉퐉 수세미에 묻히다 문득 분노가 치민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무장갑을 끼고 방문을 열어본다. 아이를 재운답시고 같이 옆에 잠든 남편이 눈에 들어온다. 쌓여있던 더러운 그릇들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다.
고무장갑으로 무장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드리운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이 말한다.
“왜 설거지에 집착해.. 그냥 식기세척기 쓰면 돼”
“이거 그릇 몇 개 된다고!”
“쌓아놨다가 한꺼번에 그냥 돌려. 내가 할까?”
“아 몰라 내가 해! 오빤 애랑 놀아줘!!”
“….”
우두커니. 내 문제점을 알고 있다. 내가 하는 게 맘 편하고,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꾸역꾸역 모든 것들이 의미가 있고 즐겁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어왔다.
하얀 본새를 자랑하며, 식기세척기가 말을 걸어왔다.
'이제, 설거지는 나한테 맡기세요.... 제발'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이 잔인한 말을 마음에 품고 살았는데, 저 말 못 하는 설거지 도구 덕분에 나는 내 인생에 한 문장을 더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근데 즐기지 못할 거 같으면 넘겨라…
나는 식기세척기에게 설거지를 넘겼다. 내가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자기 체면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혹은 대체하기 위해 나온 도구가 있다면 쿨하게 위임하기로 마음먹었다. 줄어든 설거지 시간은 다른 해야 할 일로 채웠다. 그리고 로봇청소기, 정리 전문가 등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서슴지 않고 맡기며 스트레스를 줄였다. 한 결 손이 가볍고,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엔 설거지 전문가 식기세척기가 있다. 뭐 가끔 고춧가루를 남기긴 하지만, 사람도 실수하는데 별 수 있나 쿨하게 넘어간다. 이 도구는 자신의 전공을 발휘해 가정의 평화도 지켜준다.
아 나는 식기세척기 판매원, 관련 회사에 근무하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저 미련하게 잡고만 살았던 내 인생에서 괜찮은 깨달음을 안겨줘서 고마울 뿐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근데 즐기지 못할 거 같으면 넘겨라'
오늘도 식기세척기가 나를 향해 말을 거는 것 같다.
<매일매일 도구도구>
세상의 모든 만물에는 각자의 서사가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선택해, 나를 이루고 있는 크고 작은 도구들이 가진 본연의 역할, 맥락을 생각해봅니다. 그렇게 그 안에서 이뤄지는 저만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