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사생활의 애환을 담은 드라마는 보지 않는다. 그 유명한 미생의 내용조차 모른다. 현실도 힘든데, 굳이 퇴근 후 주어진 나만의 소중한 시간에 그 현실을 두 번 겪는 느낌이 싫었다. 공감이 주는 위로가 아닌, 현실 도피를 통한 위안이 더 필요했다. 회사생활을 그만둔 지금도 여전히 그런 짠내 나는 드라마는 보기가 싫다.
하지만 머리를 텅 비우고 즐겁자고 보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류의 장면들은 종종 나왔다. 아름답고 가난한 비서와 잘생기고 돈 많은 사장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굉장히 비 현실적인 드라마에서(현실의 사장님, 본부장님, 실장님은 전부 어르신들.. 박서준, 현빈, 정경호는 사장은커녕 회사 전체에 존재하지 않는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을 신은 비서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도로에서 사장님 머리에 우산을 대느라 본인은 그 비를 다 맞고 서있다. 그냥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한 장면인데, 나는 왜 이런 장면들에 눈물이 나는 청승을 떨까..
나의 직장생활의 절반은 소위 '윗 분들'이라고 부르는 임원분들을 '모시는' 업무가 많았다. 전략/기획 파트의 업무 특성상 그 윗 분들과 대면할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기도 하지만, 직접적인 임원 관련 업무도 많았다. 그래서 나는 늘 출근이 빨랐고, 퇴근이 늦었다. 내 손에 맡겨진 일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에 업무시간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실수 따위는 없어야 했다. 부르면 바로 달려가야 했고, 물으면 바로 답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전략에 들어온 신입사원이었고, 이후로 오랫동안 막내여야 했다. 층층이 내 위로 높은 분들이 끝도 없었다. 나는 말 그대로 막 부려먹기 딱 좋은, 군기 바짝 든 신삥이었다.
중요한 회의나 행사가 있는 날은 내 구두 굽 소리가 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 뜀박질 소리가 요란한 날에는 타 부서 선배들이 오늘 'OO 있는 날이구나' 하고 격려를 할 정도였다. 나는 발바닥에 감각이 없도록 뛰고, 걷고, 서 있어야 했다. 임원들이 참석하는 주요 회의는 중요한 의사결정 외에도 수많은 불편한 이야기들이 오갔고, 신입인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어두운 진실이고 굳이 몰라도 될 무거운 짐이었다. 그 시절 담배를 물고 언성을 높이는 건 예삿일이었고, 업무로 꼼짝없이 그 공간에 갇힌 나는 그 시간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하루 종일 정신없이 모든 일정을 다 끝내고 다시 내 자리에 앉으면, 내 머리에선 담배에 쩌든 냄새가 났고 나는 물 마실 기력조차 없이 온몸에 힘이 풀렸다. 너무 긴장을 많이 하고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은 탓에 위장약을 밥먹듯이 먹어야 했고, 퇴근길에 위경련이 와서 겨우겨우 집에 간 날도 많았다.
임원들의 중요한 식사 자리는 시작 전부터 종료 후까지 챙길 것들이 끝도 없었다. 그 비싼 고급 식당들에서 덕분에 먹었던 비싼 음식들 맛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가장 빨리 나오는 메뉴로 시켜 정신없이 입에 밀어 넣으며 온 신경은 임원들의 식사 테이블에 있어야 했다. 술자리는 그 챙길 것들이 몇 배로 늘어났다. 식당 이모님들이 바빠 기다림이 길어지면 내가 직접 음식 서빙을 하기도 했고, 밥을 먹다 맨발로 뛰어가 소주병을 나르기도 했다. 참석한 모든 분들이 술에 취해 귀가하시는 까만 세단에 머리 숙여 인사하는 그 순간까지 온몸에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어쩌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엔 우산을 사러 뛰어갔다 오기도 했고, 내 키보다 20cm는 더 큰 분들 우산을 씌워드리며 걷느라 내 옷과 하이힐이 다 젖은 날 들도 있다. 나는 수행비서도 운전기사도 아닌데, 나의 본업 외 주어지는 온갖 시중드는 업무들을 당연한 듯 다 감당해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면들이 드라마에 나오면 괜히 눈물이 난다. 서럽다 힘겹다 그리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맞다 아니다 를 고민할 틈도 없이 몰아붙인 버거운 날들이 쌓이고 쌓였다. 타고나게 눈치가 빠르고 책임감이 강해 윗분들께 칭찬도 많이 들었다. 꼼꼼하게 챙기고 행동이 빨라 막내로서 '알아서 잘'하는 것들에 선배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 칭찬들이 나에게는 점점 더 무거운 부담이 되었고, 나는 늘 그 기대에 부흥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은 당연히 옷을 더 깔끔하게 차려입고 와야 했고, 시키는 일은 늘 밤을 새워서라도 지시한 것보다 더 잘 해내야 했고, 늘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해야 했고, 술은 못 마셔도 회식자리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테이블마다 꼼꼼히 챙기는 '예쁜 막내'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나의 역할이라, 그 모든 것이 나의 책임과 의무인 줄 알았다. 그렇게 나는 나를 혹사시켰다.
당연히 힘들었다. 매일매일 감당해내야 할 어깨의 짐이 너무 버거웠다. 화장실에 혼자 숨어 많이도 울었고, 지하주차장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엉엉 울기도 할 만큼 무너지는 날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늘 벌건 눈을 닦고 다시 자리에 앉아 내 할 일을 했다. 버티고 견디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나의 이 모든 힘든 날들에 보상이 있으리라 믿었다. 집은 잠깐 널브러져 잠을 자는 공간이 되었고, 집에서 밥을 먹은 기억조차 잘 없다. 긴급한 프로젝트성 업무가 떨어지면 2박 3일을 회사에서 보내고, 야근은 물론 주말 출근도 불평 없이 했고, 새벽에 퇴근하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나올 만큼 책임감이 과했다. 그 책임감이 잘하고 싶은 욕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되었고, 나를 칭찬하던 윗 분들은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100m 단거리 뛰듯 그렇게 달리면 끝까지 못 가고 중간에 쓰러진다고, 회사생활은 마라톤이니 속도를 조절하라 그리 조언을 하셨지만, 나는 지치지 않도록 더 열심히 달리겠다 그렇게 답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 온몸에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안 아픈 곳이 없을 만큼 체력도 면역도 엉망이었지만, 나는 그 신호들을 약으로 누르며 버티고 견뎠다. 결국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의 통증이 극심했고, 다리에는 감각이 없었다. 당연히 병원을 가야 하는 상태였지만, 그때의 나는 회사를 지각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계단을 기어 내려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택시를 타고 회사 사무실에 도착했다. 아침 9시도 되기 전, 나는 결국 회사 사무실에서 병원에 실려갔다. 오전 내내 병원에 누워 검사를 받고 나니, 허리디스크 4/5/6번 추간판 탈출증이라 한다. 의사가 MRI와 CT 사진을 보더니, 잔뜩 인상을 쓰며 "아니.. 지금 몇 살이에요?" 하고 물었다. 내 나이 고작 25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