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ete Nov 05. 2018

I'm Still on the Market!

리스본, 길 위에서 만난 우정

여행엔 어떤 매력이 있는 걸까.


리스본에 와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이는 넉 달째 여행을 하고 있고, 어떤 이는 6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여행을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잰은 산티아고를 걸은 후 리스본에 도착했다.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남편과 사별한 지 수 년이 되었다. 잰은 20대 시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몇 년간 일한 적이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그녀의 제2의 고향이자 로망이 되었다. 언제든 다시 오고 싶은 곳. 포르투갈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산티아고에서 비슷한 연령대의 또 다른 미국 여성을 만나 함께 리스본으로 왔다. 잰이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은 다정함이 가득한 말투와 제스처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말을 할 때,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크게 했다. 천천히 웃으면서,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듯 말을 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여행 이야기나 키우고 있는 강아지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머나먼 별나라를 상상하듯 꿈을 꾸는 표정이었다. 신트라 궁전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를 읽고 글을 쓰고 싶어 했던 그녀는, 다음 날 혼자 훌쩍 신트라로 떠났다.

내가 죽음에 대한 몇 권의 책을 썼다고 하자, 그녀는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임사체험자들의 세 가지 공통적인 패턴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무척 흥미롭다며, 큰 눈을 머금은 고개를 내게 더 가까이 댔다. 그녀의 남편은 혈액암으로 불과 석 달 만에 세상을 등졌다. 암은 갑작스럽게 퍼져나가 걷잡을 수 없었다. 사람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벌써 자녀들과 강아지가 그립다는 그녀가 그 일을 어떻게 버텨냈을지 잘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비극이라 불리는 사건들은 일어나게 마련이지 않은가. 삶의 일부로서.


죽음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있던 70대의 은퇴한 미국인 사업가 밥이 말을 이었다. 밥은 할 말이 많았다. 은퇴를 한 이후 수많은 지역을 여행해왔으니까. 그는 죽음 시리즈로 14살로 생을 마감한 강아지 이야기를 꺼냈다.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 같이 자라던 다른 강아지들이 그녀를 에워쌌다는 것이었다, 신비롭게도. 동물은 자연에 가까운지라 강아지들은 죽음의 냄새를 직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강아지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켰고, 그는 그녀를 잘 화장해주었다. 강아지의 죽음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 있던 30대 후반의 벨기에 발레 선생이자 안무가 카르멘이 말을 이었다. 자신의 강아지는 점점 시력을 잃은 데다 치매에 걸렸단다. 급기야 암에 걸려 너무 고통스러워하자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강아지를 안락사시키기로 남편과 결정한 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단다. 그러나 수의사의 한마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 “This is a natural process." 우리 모두는 자연의 일부로, 죽음은 그 일부로서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카르멘은 얼마 안 가 강아지를 다시 키울 생각이라며,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죽을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견뎌요!“라고 나는 말했고, 카르멘은 “natural process"라고 빙긋이 웃었다. 난 아직 그 내추럴 프로세스를 견딜 깜냥이 안 되나보다.

카르멘은 엄마와 함께 여행을 왔다. 몇 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려고 노력 중이라 했다. 처음엔 파리, 그다음엔 런던, 그리고 그다음엔 로마를 다녀왔고, 이번엔 리스본을 왔다. 매년 엄마와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2년 정도 아팠기 때문이다. 카르멘의 엄마는 무척 사랑스러운 60대 여성이었다.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은행원으로 은퇴를 하고 나서는 집에서 조각품(statue)을 만든다고 했다. 놀랍다. 도자기 공예도, 뜨개질도 아닌 statue라고. 운동도 매일매일 하는데 특히 수영과 요가를 한다고 했다. 그녀가 건네는 사진을 보니 그것도 플라잉 요가다. 어쩐지 60대 후반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의 탄탄한 몸과, 하루 종일 여행을 다녀도 젊은 사람보다 피로를 느끼지 않을 만큼의 체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르멘과 그녀의 어머니가 함께 여행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 많은 호스텔 여행객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도 엄마랑 여행해야 되는데’라든가 ‘난 엄마랑 그렇게 친하지 않아...’라며 아쉬워했다.  


"아이들은?" 하고 묻자, 아이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돌본다고 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1년에 한 번 있는 모녀의 여행을 위해 두 여자의 남편들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이런 그림을 꿈꾼다. 낄낄.


카르멘은 외동딸이었다. 카르멘의 엄마는 카르멘의 두 딸들의 사진을 나에게 자랑스레 보여주곤 했다. 내가 봐도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는 10살, 9살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그녀는 둘째 손녀가 만들어준 하트를 부적처럼 갖고 다녔다. 어디를 가든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그건 부적보다 더한 것이었다. ‘사랑’이니까.


호스텔에서의 저녁 식사가 있은 지 이틀 후, 나는 카르멘 모녀와 영국에서 일하는 폴란드 여,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사는 홍콩 출신 가족과 함께 리스본 근교 여행을 했다. 투어를 마치고 가이드가 추천해준, 현지에서 가장 유명한 해산물 음식점을 갔다. 하필 조개나 랍스터 같은 갑각류 해산물만 파는 곳이라, 병을 앓은 이후 이런 해산물에 알러지가 생긴 카르멘 엄마는 그곳에서 특별히 만들어준 소고기 샌드위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맛은 최고여서 다행이었다. 카르멘이 어찌나 엄마에게 신경을 쓰던지, 짐 캐리를 닮은 친절한 레스토랑 매니저는 내내 카르멘보다 더 신경을 써주었다. 짐 캐리를 닮은 매니저는 우리 여덟 명이 들어간 룸을 담당하여 서빙해주었는데, 그가 우리를 얼마나 웃겨주었던지 먹는 내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가족여행을 온 아이들을 위해 살아 있는 가재를 가지고 연극을 해주기도 했고, 우리에게 만져보도록 하면서 놀래주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처음엔 까칠해 보였으나 놀라운 자상함을 보였다.


그런 그의 머리카락에 마늘이 묻어 있었다. 카르멘이 그의 머리에 묻은 마늘을 털어주었다. 왜 마늘을 얹고 다니냐고 장난을 쳤다. 카르멘은 새까만 눈썹을 지녔고, 눈동자도 새까맸다. 새까맣고 진한 눈썹을 짙게 내리깔고 강렬하면서도 장난끼 가득한 눈빛을 보내니, 여성인 내가 봐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저 눈빛을 받은 옷은 구멍이 뚫릴 것이고, 저 눈빛을 받은 심장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것이다. 저 눈빛, 영화에서 보던 눈빛인데 얘네는 잘도 하는군. 난 마음만 타오르지 눈빛이 타오르지 않는데! 젠장.


디저트를 다 먹고 나자 카르멘은, 이 근처에 춤을 출 만한 곳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어떤 바를 추천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카르멘이 “담배 피러 나갈래요?”라고 하자, 갑자기 짐 캐리 매니저는 장황하게 어떤 설명을 했다. 나는 이제 마흔일곱 살이다, 애가 셋이다, 옛날에는 일 끝나고 많이 놀러다녔는데 이젠 조용히 쉬는 게 좋다, 내가 어느 정도 컨트롤하고 감당(manage)할 수 있는 환경을 좋아하게 됐다,며 이야기를 해대는 것이었다. 잠깐 담배 피러 가자는데 왜 저렇게 설명이 기나? 나는 의아했다.


계산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밖으로 나왔다. 홍콩 출신 가족은 떠나고, 여성 넷만 남았다. 나를 제외한 세 명의 여성이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카르멘이 얘기했다. “그 남자가 나한테 전화번호 적은 쪽지를 줬어.” 그러자 폴란드 여성이 말했다. “니가 그 남자 머리에 묻은 마늘 털어줘서 그래. 그때부터 시작됐어. 게다가 춤 출 만한 곳을 물어봤잖아. 아마 네가 춤 추러 가자고 한 거라 생각한 거 같아. 잠깐 담배 피러 나가잔 거였는데!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설명한 거야. 다음에 너 리스본 오겠구나!” 우리는 그때부터 어둠이 드리운 리스본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카르멘은 허리춤에 두 손을 얹고는 어깨를 들썩이고 엉덩이춤을 추며 말했다. “I'm still on the market!"(나 아직 잘나가!) 딸과 함께 담배를 피우던 카르멘 엄마는 너무 우스워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리스본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리스본 하늘에 우리의 웃음을 별처럼 박아둔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것도 아닌 그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