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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Nov 01. 2018

아무것도 아닌 그것

리스본, 길 위에서 만난 우정

아무것도 아닌 듯한 비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늘은 리스본에 비가 내렸다. 폭포처럼 퍼붓기도 하고, 부슬부슬 내리기도 했다. 하늘은 잿빛이고, 해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어제는 간혹 잿빛이었고, 간혹 해가 모습을 드러냈으나 생각이란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호스텔 사람들과 근교 투어를 바삐 다녔다. 한 달 동안 웃을 웃음을 하루에 몰아 웃고 난 다음날, 나는 이렇게 비참한 기분을 ‘당했다’. 이쯤 되면 조울이라 할 만하다.


며칠 전 룸메이트였던 미국인이자 벨기에에 거주하고 있던 남성은, 지난겨울 벨기에는 12월에 해가 비친 시간이 총 15시간이었다고 했다.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는, ‘기상이변이군. 겨울에 하루 해가 15시간이었다니. 유럽의 한여름 못지않은걸’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해주었다. ‘한 달 동안’ 해가 비친 시간이 15시간이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근교 투어를 함께 다닌 벨기에 여성도 같은 말을 했다. 날씨 얘기를 하며, 날씨에 따라 민족성이 좀 다른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해가 많이 비치는 지역의 유럽인들은 밝고 유쾌하며 생각을 많이 안 하는 것 같고, 날씨가 변덕스럽고 해가 잘 들지 않는 지역의 유럽인들은 까칠하고 차분하고 내성적이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물론, 개인마다, 사람 성격마다 모두 다를 것이라며,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려는 교양 있는 말로 우리는 마무리를 하였다.

오늘 이 비참한 느낌은 그러면 날씨 탓일까. 반드시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날씨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의 한가운데 지점을 찍은 오늘, 몸은 지치고 마음은 외로울 때가 된 즈음, 그것도 비가 이토록 내리고 쌀쌀하여 돌아다니고 싶지 않은 날, 나는 카페에 앉아 또 장 그르니에를 읽은 것이다. 나는 장 그르니에를 읽으며 한편으론 경외감이, 한편으론 컨트롤할 수 없는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이미 알고 있잖니. 그르니에 오빠를. 그르니에 오빠가 어떻게 쓰시는지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일컬어도 소용이 없었다. 나의 모든 글은 쓰레기 같아 보였다. 아니, 쓰레기가 맞다. 이 글을 쓰며 자학을 하는 바로 이 순간만 속이 후련할 뿐.


나는 오랫동안, 다른 모든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 ‘나’뿐이었다. 나만 아니면 되었다. 사실, 이 말도 과장일 수 있다. 정확히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로 영적인 관점을 문학적 필체로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과 코와 입을 각각 다른 연예인의 모습으로 성형한 사람을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장 그르니에와 페르난두 페소아뿐이라서 그르니에를 자꾸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무수히 많았다. (페소아는 우울하게 살았기 때문에 거부하고 싶다. 나는 평생을 우울하고 불안하게 보내고 싶진 않다.)

카페에서, 오늘따라 맛도 없는 연어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다가 힘없이 나와 옆에 있는 성당으로 불쑥 들어갔다. 리스본의 성당은 어느 성당이나 들어가면 기도가 절로 나온다. 많은 유럽의 성당 건축물이 그러하듯이. 나는 그르니에처럼 글을 쓰고 싶다고 기도했다. 마음에 아무런 감흥도, 탄성의 마음도, 그윽한 음성도 깃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누군가들이 함께 기도문을 외우는 소리가 작은 파장처럼 퍼져나갔다.

그때,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되뇌며 잠잠히 앉아 있으려니 평화가 저 밑바닥에 고이는 것 같았다. ‘너는 그저 네가 되면 된다.’


장 그르니에의 친구가 그에게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2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 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 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만 눈물이 쏟아져 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는데, 그 눈물의 의미, 그러니까 그 ‘무력함’의 눈물의 의미가 희끄무레한 안개처럼 마음속에 자욱하게 당도했다.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 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나는 어떤 관광명소를, 고결한 성당을, 아름다운 해변을, 압도하는 미술작품을, 부드러운 와인을, 고유한 커피를 감상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난 뭔가를 알기 원했다. 깨닫길 원했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인 카보 다 호카 절벽에서,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잔인하기 짝이 없는 포말을 내뿜으며 리바이어던처럼 모든 것을 삼키고 할퀼 듯한 바다 물결로 내 영혼을 밀어붙여보고 싶었다. 내 인생의 절반 정도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이 지점에서 나는 모호한 삶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왜 이토록 깊은 평안을 주는 것일까.

“당신들이 눈먼 사람들이라면 죄가 없소.” 오늘 아침에 묵상한 성경구절이다. 이어 머릿속에 떠오른 "보지 못하는 사람은 보게 될 것이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될 것이다"라는 문구가, 노래처럼 기도문을 외는 사람들의 음성과 함께 내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나 아닌 다른 것이 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비교의식도 없이 나를 나대로, 타인을 타인대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을 고스란히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그것이 되고 싶어졌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그것임을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여행의  한가운데 지점이자 내 인생의 정중앙 지점일지도 모를 오늘, 비로소 내게 찾아온 자유는 바로 이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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