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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Oct 31. 2018

넌 오늘 뭘 봤니?

리스본, 길 위에서 만난 우정

리스본에 다다랐다. 포르투에서 쉽게 버스에 탑승하여 3시간 반 만에 리스본의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메트로를 타고 도심에 이르러 나를 처음으로 반겨준 것은 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였다.  


리스본의 역사를 전혀 몰랐다면, 나는 지나치게 규격화된 거리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계획도시의 느낌이 단번에 들 정도로, 길은 어디든 찾아가기 쉽게 직선으로 뻗어 있고 직각으로 돌게 되어 있었다. 길의 구조만 보면 뉴욕이 생각날 정도였다. 구불구불한 곡선이나, 예측하지 못한 데서 무언가가 툭 튀어나올 듯한 상상 밖의 길이 거의 없다는 것이 리스본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물론 알파마 지구를 발견하면서 그것이 나의 오해였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되었지만.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 그리고 1988년 8월 25일 시아두 화재. 두 번의 재앙과 같은 참사로, 리스본은 완전히 무너진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험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특히 리스본 대지진은 홀로코스트가 20세기 사회에 끼친 영향에 비견될 만큼 18세기 사회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그 참사의 규모를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진도 8.5~9.0에 해당하는 강력한 지진, 그에 따른 화재와 뒤이은 해일로 추정 사망자 수만 3만에서 10만에 이르는 참사였다. 리스본 시내 건물의 85퍼센트 파괴. 도시 자체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셈이다. TV로 목격한 9. 11 사건, 차마 글로 꺼내기에도 죄책감이 드는 4. 16 세월호 사건, 그리고 세계의 각종 자연재난을 떠올려봤을 때, 나와 같은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사라져버리는 충격은 실재를 넘어선 트라우마를 낳는다.

 


난세에 영웅 난다고, 대지진 당시의 총리였던 폼발 후작이, 폐소공포증에 걸린 왕을 대신하여 재빨리 뒷수습을 했다. 그의 재건 작업은 신속하고 질서정연한 것이었다. 그는 건축가 에우제니우 두스 산투스와 카를루스 마르델을 등용하여 파괴된 도시를 완전히 허물고, 내진 능력과 기능성 및 미관을 모두 갖춘 새로운 도시를 설계하게 했다. 두 건축가는 건물을 높이 올리는 대신 옆으로 넓혔고, 각 건물은 지진의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내진 설계에 집중했다. 건설 당시에 도로를 네모반듯하게 만들고 건물의 높이와 모양을 제한하는 계획을 발표하자, 그곳에 많은 지분을 갖고 있던 귀족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개성 있고 다양한 건물을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폼발 후작의 의지는 단호했고,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상인 계급과 중산층이 새로운 도시 건설에 협조했고, 바이샤 지구는 1개월 만에 완벽하게 철거되고 맨바닥에서 신시가지 건설이 시작되었다. 결국 바이샤 신시가지의 건설은 도시의 주역을 귀족에서 상공인 계층으로 옮아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대지진 이후 리스본은 중세 도시를 탈피해 금융과 무역이 발달한 근대적 상업 도시로 성장한다. 어렸을 적 부루마블 게임에서, 리스본에 걸렸을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생각해보라.  


밤에 전망대에서 리스본 도시를 조망하면서, 이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기울여졌을지를 상상해보았다. 지금은 이토록 아름다운 조명으로 반짝이지만, 이보다 훨씬 강력한 광도로 닷새 내내 화염에 휩싸인 리스본을 바라본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만 해도 참담했다.


호스텔에 도착하니 생기 가득한 사람들이 나를 반겨준다. 포르투에서 한적하고 게으르게 흐느적거렸던 분위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곳은 도시를 알고, 사람을 알고 싶어 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가득해 보였다.

 

호스텔에서, 그것도 4인실이나 6인실 혼성 도미토리의 호스텔에서 나이든 여행객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첫날 내가 만난 여행객들은 30대 후반, 60대, 그리고 70대였다. 물론 20대는 기본이요 10대 고등학생들도 많다.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독일, 폴란드, 이집트, 네덜란드, 벨기에, 브라질, 필리핀, 한국 등 거의 모든 대륙의 사람들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대륙보다도 더 신기한 것은 거의 모든 연령대였다. 이들은 4인이나 6인 도미토리에 묵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곳에 오려고 10살, 12살짜리 남매를 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홍콩 출신 가족은 프라이빗 룸이 없어도 6인 도미토리에 묵었다. 매우 좋은 독일인 고등학생 두 명과 함께 묵게 되었다고 그들은 좋아했다. 한 60대 벨기에 여성은 딸과 함께 왔고, 어느 70대 미국 여성은 산티아고에서 만난 또 다른 여성과 함께 스페인을 거쳐 이곳에 왔다. 그리고 전 세계를 여행한 것 같은 70대의 은퇴한 미국 남성 역시 이곳 6인 도미토리에 묵고 있었다. 이들이 여기 묵는 이유는, 단연,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플랫폼 비즈니스이던데, 내가 묵는 호스텔은 그런 차원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확히 엄청나게 훌륭한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기능’이라고 말하기엔 뭔가 빠진 것이 있다. 바로 ‘스피릿’이다.


이 호스텔의 어떤 매력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일까. 리셉션에 있는 직원들부터 느낌이 달랐다. 매우 활달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데다 친근감이 굉장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자신들의 일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언제나 친절했고, 예의가 있었으며, 여행객들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여행객들이 알기 원하는 그 이상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이곳에 묵는 동안, 한 번 이상은 저녁 식사를 함께해야 하는데, 그 저녁 식사가 내 생각엔 하이라이트 같았다. 호스텔의 주인인 여자 사장님이 직접 요리하는 코스(전채-수프, 메인요리, 디저트) 요리에다, 와인이나 음료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는데 10유로다. 게다가 아침식사는 바게뜨나 호밀식빵에, 햄, 치즈, 스크램블, 사과나 오렌지, 바나나와 같은 각종 과일, 요거트, 씨리얼, 커피와 주스 등의 뷔페가 3유로. 이러니 아침식사와 저녁식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이 가격에 이 정도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없다. 수도인 리스본에선 더욱이! 물론 돈 문제만이 아니다. 이 식사로 인해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 특히, 이곳에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이곳의 독특한 문화 때문인 것 같았다. 손님을 ‘돈’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한마디로, 커뮤니티가 생성될 수 있는 곳이었다. 영국의 저가항공사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는 폴란드 여성은 이곳 운영자는 돈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인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운영자가 지닌 코어를 ‘열정’이라 표현했다.


장기간 묵은 사람들을 소개하며 그들의 소회를 듣고, 정성들인 요리로 여행객들을 먹이고, 함께 신나는 바 투어로 밤 늦게까지 춤을 출 수 있게 하는 곳. 이곳에서 사람들은 말이 통하고 스피릿이 통하는 사람 아무에게나 말을 걸고, 리스본 여행을 제안하고, 식사를 함께한다. 서로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삶을 경청한다. 우린 기꺼이 듣고자 하고, 기꺼이 이야기하고자 한다. 피아니스트이든 발레 선생이든 작가든 은퇴한 교수이든 은행원이든 위스키 회사 직원이든 변호사이든, 우리는 여행복장을 하고 어느 정도는 평소보다 꾀죄죄한 모습으로 앉아서 서로의 국적과 직업과 나이와 경제력을 뒤로하고 인격 대 인격으로 마주한다.

“넌 오늘 뭘 봤니? 넌 오늘 뭘 발견했니? 뭐가 신기했니? 이곳과 저곳은 뭐가 달랐니? 뭘 즐겼니? 뭘 느꼈니?” 직선적으로 이렇게 묻지 않지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은 대개 이런 내용들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이런 내용들 아닐까? 서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아가고 있는지.


여행에선 마음을 열수록 다가오는 것이 많다는 걸 실감나게 느낀다. 공유한 정보와 경험과 감정이 어우러져 새로운 유기체가 되어간다. 이렇게 배운 것들이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좋은 여행에서의 경험은 뼛속 깊이, 유전자에까지 새겨진다.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다니는 거겠지.


오늘 난 무엇을 보게 될까. 오늘 당신은 무엇을 보게 될까. 난 이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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