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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te Oct 24. 2018

잘나지 않고 운치 있는 이여, 포르투

포르투, 내 인생의 붉은 혁명을 찾아서

숙소에 짐을 풀었다. 도우루 강변의 서쪽 끝 쪽에 숙소는 자리하고 있었다.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다. 하지만 시내 자체가 그다지 넓지 않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누군가 짐을 챙겨갈 수 있도록, 다시 돌아와도 곧바로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짐을 정리해두었다. 그러곤 집 근처 슈퍼마켓을 돌아보았다. 포르투갈 물가가 왜 그토록 싸다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포르투를 상징하는 도우루 강을 따라 쭉 올라갔다. 첫날 아침 8시에 비행기가 도착했고 숙소에서 11시쯤 나왔기 때문에 일찍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첫날은 큰 그림을 보고 싶었다. 포르투의 큰 그림.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의 느낌을 몸 전체로 경험해보고 싶었다.


이 도시는 이방인이 흔히 느낄 법한 황량함과 소외감, 외로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압도되는 역사적 건축물도, 화려한 풍광도, 잘남을 뽐내는 부유한 상점들도 없다. 그렇다고 일상에 찌든 여행객들을 또 한 번 심장 떨어지게 하는 슬픈 가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공항에 내려 도시까지 오면서, 나는 내가 내 고향, 내 집을 떠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나 낯섦을 느끼지 못했다. 너무 잘나지 않으면서 운치 있는 사람. 그래서 가까이하고 싶은 편안한 사람. 그 정도의 느낌이 포르투다. 물론 아름답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잔잔하고 편안한 아름다움이다.

 

걸으면서 오감을 의식적으로 열었다. 갑자기 짙은 향수 냄새가 나는 때는, 뒤에서 나를 추월해 걷는 검고 긴 생머리 여인의 막 감은 샴푸 냄새 때문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때는, 인적이 드문 강변에 노부부가 앉아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다. 세월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이들. 도도히 흐르는 강 앞에서 조용히, 나란히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부부는 그때의 침묵을 권태로움으로 느낄 것이다. 어떤 부부는 평화로 느낄 것이다. 둘이 그간 얼만큼 교감을 했느냐에 따라 침묵의 채도는 다를 것이다. 자기 자신과도 마찬가지 아닐까. 자기 자신과 얼만큼 교감했느냐에 따라 정적이고 고요한 풍경 앞에서 평화를 느낄 것인가, 권태를 느낄 것인가가 결정되지 않을까.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오래 응시하진 않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은 더 많은 것을 볼 것을 포기하고서. 도우루 강 앞에 작은 놀이터가 보인다. 아이들이 구름사다리를 오르고 있다. 옆에선 엄마들이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있는 어린 유아를 붙들어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면. 아이들은 이곳이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우루 강 앞의 놀이터인 줄도 모를 것이다. 그저, 놀이터와 다른 친구들만 있으면 된다. 그들과 뛰어노는 것에 집중하여 주변 풍경을 잊는다. 저 천진난만함, 현재에의 집중, 그리고 작은 것에의 경탄과 희열. ‘어른의 일’로 근심 걱정에 가득 찬 사람에게는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을 것이다.

조금 더 가니 와이너리들이 눈에 띈다. 한눈에 봐도 관광용으로 세워진, 테이스팅과 투어를 위한 와이너리들이 즐비하다. 그곳 중 한 곳에 가서 포르투와인 핑크를 맛보았다. 맛이 달달하여 식사 중간보다는 식전이나 디저트용으로 마신다던데, 확실히 다른 와인보다 달콤한 맛이 더했다. 알콜 도수는 보통 와인보다 높다고 하던데 적은 양의 와인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분명 그런 것 같다. 큰 길을 나와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보았다. 그곳에도 운치 있는 카페들과 와인 바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걸 보니, 지금 날씨는 좋아도 성수기는 아닌 듯했다. 나는 이런 좁은 골목길을 사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알지는 않는 곳,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애정할 수 있는, ‘취향’을 지닐 수 있는 곳. 이 나무 의자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며 장미꽃 한 송이를 바치고 와인을 마시는 클리셰를 실천한 연인들도 있겠지....


그 유명한 타일무늬 아줄레주들은 아무 건물 벽이나 장식하고 있다. 이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상징이기도 하다. 리스본에 가도 아름다운 아줄레주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 건축물들의 상징인 아줄레주 위로 드리워진 빨랫감들을 보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깃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일상을 함께한, 먼지들을 한껏 머금은 저 옷들이 역사 깊은 아줄레주 위에 드리워져 바람을 맞이하고 관광객들을 지켜보고 있다. 거기, 누가 살고 있군요. 나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숨을 쉬면서 말이에요. 그렇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생생한 호흡을 가지고선 나와 함께 이곳에 머물러 있다.


여행은 그렇게, 머무름인지도 모르겠다. 현재에 생생히 머무름. 현재에 똑바로 눈뜸. 생생히 머무르고 똑바로 눈뜰 때에야 동쪽 끝에서 온 나와 동시대에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는, 이름 모를 서쪽 끝의 사람까지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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