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맞이한 시작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한 해의 반 이상이 지난 이 시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 한다는 건, 뭔가 천천히 잦아들었던 에너지를 바짝 끌어올려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는 8월 중순.
뭔가 거창한 시작이었던 것 같지만, 실은 아이 초등학교 입학이었을 뿐이다. 기대감과 설렘, 약간의 긴장감 정도면 충분했을 텐데, 기다림, 초조함, 걱정보다 더 큰 우려의 감정이 더해졌다. 8월 중순에 중국학교 안의 한 국제부에 입학 접수를 했는데 8월 마지막 주가 되도록 입학 공지가 없었고 면접 이틀 전에야 연락이 왔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준 다음 1:1로 수업 내용에 대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거나, 짧은 문제를 읽고 풀어보는 형식의 인터뷰였고, 학부모들도 교장 선생님과 간단한 면접을 봤다. 갑작스러운 통지에 번갯불에 콩 볶듯 면접을 치렀다. 그러고 나니 바로 다음 주가 입학, 어마어마한 준비물을 챙기고 나니 입학식, 정신 차리고 나니 학부모 모임. 그동안 낑낑대며 독학한 중국어와 야금야금 잊혀간 영어를 주섬주섬 섞어서 내뱉고 나면 한동안은 안드로메다로 간 정신을 찾아다녀야 했다. 되지도 않는 글을 끄적인다고 중국어 수업을 등록하지 않았던 게 후회가 됐다.
중국에서는 이번 학기부터 초등학생 1, 2학년 숙제가 없어졌는데, 첫 오리엔테이션에서 담임선생님 두 분이 입을 모아 말씀하셨다. 숙제는 좋은 면이 훨씬 많다고, 필수는 아니지만 '제안' 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엄마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숙제가 많고도 참 많았다. 그리고 제안이라던 숙제는 어느새 필수가 되었다. 10월 말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눈코 뜰 새 없이 아이와 함께 달려왔다. 아이가 뭘 하든 뒤에서 모르는 척하고 든든하게 서있어 주려 했던 다짐은 어디로 가고, 제 페이스대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고 있는 아이 옆에서 나는 동동거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중국 학교와는 힘든 포인트가 달라서 아이가 학교를 참 좋아한다는 점이다. 아이가 학교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나의 긴장도 조금씩 풀려갔다.
그런데 한참 동안 바쁘게 아이와 발맞추다 보니 자꾸 글이 눈에 밟혔다. 중국어도 영어도 눈에 밟혔지만 그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면 글은 저 멀리 타들어가고 있는 불이었다. '이러다가 또 흐지부지 되는구나, 뭐 그 전에도 열심히 쓴 건 아니었지만, 그래 흐지부지가 내 전공이지.. 하루키는 아침에 눈 떠서 내리 정해진 만큼의 분량을 쓰고 일어나 달리기를 한다던데, '유혹하는 글쓰기'에서는 문을 닫고 쓰라는데, 나의 문은 아주 활짝 열려있구나... ' 하는 생각들로 타들어 가는 불을 관망했다.
관망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다 타버려서 재만 남으면 어쩌지, 흔적도 남지 않으면 어쩌지.. 잘 쓰려고 하는 글이 아니더라도 일단 쓰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한 번쯤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무리란 걸 해보고 싶었다. 브런치 북에 도전했지만, 실은 브런치 북을 수단으로 기한 내에 '마무리'란 것에 도전한 것이었다.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한 번이라도, 해 낸 적이 없는 인간'이라는 게 나에게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 같았고, 나 스스로 그걸 조용히 깨 보고 싶었다.
처음부터 10 편으로 목차를 짰고, 지금 내 목구멍 입구에 가득 차오른 생각들을 썼다. 아이를 키웠던 6년 동안 조금씩 차올랐던 이야기들이다. 엄마의 이야기이고 식상한 이야기이고 고지식한 이야기라서 어디다 말할 데가 없었다. 그냥 노트에다가 틈틈이 연필로 써서 노트북으로 옮겼고 혼자 쓰는 일기이지만 보여주고 싶기도 한 일기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렇다 해도 발행하는 글이고, 응모하는 글인데, 시간을 충분히 들여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해 쓰지 못한 부분이 후회가 되고, 최소한의 분량만 겨우 채워 응모한 꼴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브런치 북을 완성하고 나니 마음속 어딘가에 묶여 있던 끈이 탁 풀어진다. '응모'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상'은 아무나 못한다. 나는 항상 중간을 건너뛰고 '응모'부터 아무나 못한다고 여겼다. 이럴 땐 참 논리적이지 못하다.
브런치 북을 준비하며, 준비하는 것 자체 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으로 마감을 지켜서 쓰는 경험을 했다. 조금이라도 매일 쓰게 되었다. 문을 닫고 쓰다가 문을 열어보는 경험을 했다.
그날 글을 올리고 나서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갔다. 남편이 불쑥 말했다.
"조 작가님."
"뭐야 하지 마~ "
"얘들아, 엄마가 오늘 책 쓴 기념으로 밥 먹는 거야." 누가 듣을세라 남편의 입을 허겁지겁 틀어막았다.
"책 아니거든!" (그 입 닥쳐라 눈빛 발사)
"이제부터가 시작이야."
"...."
여전히 쓰고 싶은 글은 저 너머에 있고 쓸 수 있는 글은 여기에 있다. 그래도 여기서부터 쓸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해 보면 언젠간 저 너머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