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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Nov 02. 2021

핸드 드립

내 마음대로 중국어 공부 : 水冲咖啡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지는 갈색 물방울을 바라본다. 드물게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 핸드 드립. 


결혼할 때 친구들이 선물로 줬던 에스프레소 기계를 주욱 쓰다가, 아이가 있고부턴 캡슐 커피 머신을 애용했다. 원두를 내릴 1분의 시간도 없었다기보다는 60초의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색색깔의 캡슐 중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골라잡아 넣고 '징' 울리면 끝!. 그런대로 괜찮은 맛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내린 커피는 아이 옆에서 홀짝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고는 나중에 반쯤 남은 채로 엉뚱한 장소에서 발견되곤 했다. 집에서 마시는 커피는,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한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얼마 전, 캡슐 커피의 환경오염 문제를 접한 데다가 마침 친구 집에서 드립 커피를 마셔보게 된 계기로 타오바오에서 手冲咖啡(드립 커피)를 검색해 핸드 드립 도구들을 장만하게 되었다. 캡슐 커피보다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데다가 맛도 훨씬 좋았다. 단, 조금 어색하고 불편한 점이 있다면 가만히 앉아 물을 천천히 붓고 투명한 유리 주전자 안에 한 잔 분량이 차오를 때까지 눈을 끔벅거리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 청소를 할 때도 요리를 할 때도 뭐든지 최소 투입 대비 최고 효율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즈음 아는 중국 친구네 부부가 커피 머신을 새로 장만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우와 멋지네요. 새로 장만하셨나 봐요."라고 으레 하는 답을 보냈는데,

"커피 마시러 놀러 오세요."라는 답이 와서 조각 케이크를 사들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가서 보니 에스프레소 머신인 줄 알았던 그 기계는 커피 원두를 가는 '전동 그라인더'였고, 테이블 위에는 핸드드립 도구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커피 가는 기계가 뭐 또 그리 특별할 게 있나 싶었는데, 내 생각이라도 읽은 듯 친구 남편 분이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

대충 요약하자면, 그라인더 기계로는 커피 원두 굵기를 미세하게 설정할 수 있었으며, 뜨거운 물을 따르는 보온 주전자는 커피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온도라는 92도로 설정되어 있었다. 커피 중량을 재는 전자저울에는 스톱 워치가 달려 있어서 정확한 중량을 재는 동시에 물을 붓는 초수까지 정확히 잴 수 있었다. 커피를 내리기 전에 뜨거운 물로 여과지를 적시고 종이 잡내를 없애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정확한 비율로 계량하여 마신 이후로는 커피 맛이 항상 일정하게 좋다고 했다. 커피보다 차를 많이 마시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요즘 드립 커피가 유행이라고도 했다. 커피 맛은 좋은 것 같았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쳤지만 계속 듣다 보니, 커피 한 잔을 마시는데 이 정도 품이 들어서야 쉽게 손이 가겠나 싶었다. 나아가 그렇게까지 안 해도 커피 맛만 좋더라 하는 마음이 뾰족 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맛을 더 잘 음미하기 위해서라며, 예쁜 커피잔이 아닌 작은 전통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두 세 모금에 바닥이 보이는 찻잔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텁텁한 차 맛이 혀 끝에 연상되는 것 같아 영 어색하기도 했던 참이었다.

"(커피 마시러 왔는데) 바리스타 강의 들으러 온 것 같아요."

"커피 마실 때 커피잔이 예쁘면 더 맛있는 것 같더라고요. 전통 찻잔에 커피 마시는 건 처음.. ㅎㅎㅎ."


결국 불편한 마음을 조금 내비치고 말았다. (나만 아는 불편한 마음이겠지만)

나는 말을 길게 하는 것보다 듣고 있는 게 편한 쪽이지만, 상대방의 무지를 전제로 하는 일방향 소통은 듣고 있기가 불편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편한 마음속 다른 무언가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는 것'에 이토록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건 어찌 됐든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A부터 Z까지 말할 수 있다는 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나 인식을 앞서는 정도의 순수한 몰입 말이다.


집에 오는 길에,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냈다.

"커피 너무 맛있었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冲 

水冲咖啡의 冲 은 '헹구다' , '물에 풀다'는 뜻으로, 水冲咖啡하면 손으로 물을 부어 내리는 커피, 즉 드립 커피를 뜻한다. (shuĭchōng kāfēi)


冲入 (chōngrù): 돌입하다. 돌진하다. 

要冲 (yàochōng):요충지 

冲击 (chōngjī) : 세차게 부딪치다. 

冲 (chòng) : (对着,向着)향하다. 

 


중국어는 한자 하나에 왜 이렇게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건지, 같은 한자에 성조는 왜 또 다른 건지 투덜대며 사전을 찾아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천히 물을 부어 맛보는 드립 커피의 冲이란 한자 안에는 지체하지 않고 돌진한다는 뜻도 있었다. 초 안빠르게 압축하여 내려 마시는 에스프레소보다, 천천히 또르르 떨어지는 드립 커피가 풍미 있는 이유를 어쩐지 이 한자 하나로 것도 같았다.


나는 천천히 떨어져서 만들어내는 커피 한 잔을 기다리지 못하고, 뜨거운 증기로 빠르게 내리는 에스프레소를 선호했었다. 내가 정확히 원하는 맛이 아니더라도, 그와 대략 비슷하면 오케이. 100이 아니더라도 99면, 아니 90이라 해도 만족했다. 요행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인정에 목말랐었다. 나도 모르게 내 마음보다는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걸 더 중요하게 여겼다. 우직한 열정보다는 순간의 반짝임에 끌렸다. 배움에 있어서는 언제나 중단기 보다는 초기에 더 소질을 보였다. 


뜨겁게 끓어오르는 열정이란 언뜻 생각하면 '에스프레소'같지만, 진정한 열정이란 '드립 커피' 같은 것 아닐까 하고, 커피 한 잔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느리고 더디게 가는 열정에는 눈길을 잘 주지 않는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는 투명한 갈색이라서 맹숭맹숭할 것만 같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열정을 축적한 자리에는 비교 불가한 농도 짙은 맛이 존재한다. 열정의 산물이다.


천천히 떨어지는 갈색 투명함이 짙어지고, 묵직하게 고여 있던 커피 향이 흘러나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운다. 살짝 씁쓸한 맛을 먼저 한 모금 머금자, 곧이어 달콤한 산미가 입 안에 남는다. 하나의 한자 안에 감춰진 여러 가지 뜻처럼 아직은 알쏭달쏭하지만, 천천히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것이야말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가만가만 한 모금씩 알아간다. 





사진 출처 : pex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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