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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12. 2020

아들 둘이 뭐가 어때서?


영상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한동안 멍하니 핸드폰의 까만 화면을 바라본다. 생각을 지우려는 듯 아무것도 없는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다. 그냥 서운하다. 아니 너무 많이 서운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가서 닿을 곳이 없어 한참을 맴돌다가 까만 액정 위에 뚝뚝 떨어져 버리고 말았던 그 서운함이란..


둘째도 아들이라는 사실이 이리도 환영받지 못할 일인가?


그랬었다. 친정엄마는 내심 내가 아이를 하나만 갖길 바라셨다. 너희가 결정할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누구네는 아이 하나만 갖기로 했다더라. 애 하나 있으니까 해외고 어디고 셋이서 그렇게 여행을 잘 다닌다더라, 아이 하나 제대로 키우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 줄 아냐, 너를 얼마나 힘들게 공부시켰는데...”

그러시면서도 마지막에 그래도 딸은 하나 있어야 하긴 하는데...라는 말씀을 한 번씩 덧붙이셨었다.


남편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보다 터울이 짧은 임신을 하게 되어 당혹스러웠던 때 나를 토닥이면서 그가 했던 말은,

틀림없이 딸일 거야.”


이제 막 돌을 갓 지난 첫째 돌보랴 입덧하랴, 태명은 물론 태몽조차도 나의 몸과 마음에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었던 그때, 남편은 그 어떤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태명을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둥희야~”


남편에게 ‘둥희’가 뭐냐고, 태명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렇게 이름을 막 짓냐며 쏟아부은 후 휙 돌아서자마자, 희한하게도 나는 그 이름을 마음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첫째의 태명이 ‘둥둥이’였고 우리는 그 이름을 무척 좋아했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둥희’는 입에 착 붙었고 심지어는 성별을 알고 난 후에도 계속 뱃속의 아기를  ‘둥희’라고 불렀다.


아들 선호 사상이란 이제는 정말 책 속의 활자로만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대를 이어야 하니 아들을 바라는 것 같다는, 그것마저도 대놓고 했다간 바로 며느리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될 어느 시부모님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올 뿐. 요새는 확실히 아들보다는 딸이다. 둘째 임신 소식을 알았을 때는 첫째가 돌을 갓 지난 때였기에 나 자신부터 당혹스러웠던 만큼 주변 사람들의 뜨뜻미지근한 축하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둘째도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반응은 한동안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속상했다. 물론 생각해보면 모두 나를 위한 말들이었지만, 나보다는 항상 아이가 먼저였던 그 시절 나는 초보엄마였고 철없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뿐인가,

예쁘고 작은 돌멩이 같은 두 남자아이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한 말씀씩 하신다.

“아들 쌍둥이예요?”

23개월 터울인데 둘째의 발육상태가 좋아서 쌍둥이 유모차에 앉아있으면, 언뜻 보면 정말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곧이어 “엄마 힘들어서 어쩌나~.”  “밥 좀 더 먹어야겠네.”


중국에서는 더하다. 요새는 그래도 여유가 되면 둘씩 낳는 추세이지만 대부분은 아이 하나에 할머니나 보모까지 대동하며 다니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엄마 혼자 남자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다들 다니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쳐다보거나, 더 나아가 이렇게 말을 건다.

“둘 다 이 집 애들이에요? 엥? 혼자 애 둘을 보는 거예요? 와 대단하네~.”

이 곳에서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면 잠시 다른 집 아이를 같이 봐주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이 둘 그것도 아들 둘은 흔하지 않은 광경인 것이다.


보통은 어린아이를 키워보았던 엄마의 마음으로, 지금 얼마나 힘들지 알고 있다는 따뜻한 눈길로 건넨 말들이기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는데서 생기는 불편한 감정은 걷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아들이라서 어쩌나 하는 시선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나는 딸을 바란 적도 없고, 아들을 바란 적도 없다.

딸이라면 아빠를 닮았으면 좋겠고 아들이라면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진 적이 있다.


딸이라서 감정지능이 뛰어나고 부모와 더 잘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라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게 아니다. 무엇을 보고 배웠느냐의 결과일 뿐이다. 물론 생물학적인 다름과 마찬가지로 성별 간에 타고난 기질적 다름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아이 개개인의 기질과 특성을 덮어버릴 정도의 일반화는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들은 일반적으로 정서지능도 딸보다 더 낮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반응도 성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엄마는 자녀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 딸보다는 아들에게 비난이나 처벌적 반응을 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부정적인 정서 표현을 할 때 엄마가 공감하고 아이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끌어주면서 행동의 한계는 정해주는 감정 코칭 반응을 보인다면, 아이의 회복탄력성이 높아져서 아들의 정서 지능이 향상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아들 익힘책, 성별에 따른 탄력성의 매개효과 /아동학회지-


그렇기에 아들에 대한 편견은 부모인 우리 자신이 먼저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들은 결혼하면 남이지만, 딸은 엄마의 평생 친구라는 말이 있다. 이제 막 6살, 4살 아이들을 키우며 아직 먼 훗날까진 그려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가까운 미래인 사춘기 시절부터 남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들을 키우는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딸을 아들처럼 키우는 것보다 아들을 딸처럼 키우는 게 훨씬 재밌다. 딸을 굳이 아들처럼 키울 이유는 없겠지만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 같은 쨍한 구슬 빛깔은 아니지만, 거친 풀밭에서 반짝반짝하고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진 하얀 돌멩이를 발견했을 때의 그런 아름다움이 있다. 아들들에게는.


아들을 키우는 게 지지고 볶는 힘든 고행길이 되지 않기를,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과 사람 관계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는 아들 육아가, 형제 육아가 뼈 빠지게 힘들다는 편견에 외치고 싶다.


아들 둘이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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