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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an 10. 2021

그 때와 지금, 너와 나

비교하는 마음

  ‘교육 당국 공지에 따라 12월 25일 예정되었던 크리스마스 연극 발표회는 학부모님들의 참석 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에 아이 유치원에서 보내온 공지였다. 큰 아이는 올해 9월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서 유치원에서 하는 연말 발표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아이들은 전날, 전전날 했던 리허설을 크리스마스 날에도 그대로 했고, 우리는 녹화 영상을 집에서 함께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만 했다. 며칠 후엔 기어코 모든 교육 기관의 무기한 방학이라는 조치가 행해졌다. 늦은 오후, 하원 직전 전해진 소식이었다. 내일부터 갑자기 유치원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는 급작스런 소식에 어떤 친구는 울었고, 어떤 친구는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고, 나는 가만히 있었다고, 아이가 집에 와서 전했다.


  이 곳, 선양은 지난해 초 코로나가 처음 발병한 후 한동안은 마비상태였다가 3월 말 즈음 외국인 입국을 막기 시작하면서 점차 일상에 가까워졌었다. 실내에서도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어딜 가나 사람이 북적였다. 거리두기는 먼 이야기였다. 안도감 그리고 뿌듯함 같은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고 더군다나 중국 동북 쪽이라서 맨 처음 코로나가 발생한 지역들과는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도 한참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네 가족, 지인들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으며 안타까웠던 동시에, 내심 내가 발 디딘 현실에 안도하며 익숙해졌던 일상이었다.


  그러다 며칠 전 한국에 다녀왔다던 조선족 할머니가 확진 판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할아버지와 손자도 연이어 확진 발표가 났다. 그 할머니는 2주 격리와 핵산 검사를 모두 마친 후에 의아하게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했고, 손자가 다니던 학교는 제일 먼저 문을 닫고 격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웨이신 단체 창들에는 할머니의 이동 경로와 함께 핸드폰 번호까지 공유되기 시작했다. 확진자가 10명을 넘어서자 모든 교육 시설은 문을 닫았고, 20명을 넘어서자 선양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전수검사가 실시됐다. 한국에서는 천 단위가 거론되는데, 현재 29명의 확진자로도 이 도시는 거의 마비상태다.


  아파트에는 단지 전체를 둘러싼 4개의 문이 있는데 이 중 두 개의 큰 입구는 물리적으로 막아놓은 상태이다. 경비원과 ‘통행금지’ 푯말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지만, 도대체 어디서 들고 온 건지 궁금해지는 거친 나무 판때기와 철망이 문자와 언어를 대신한다. 말하지 않아도, 외국인인 나에게도 느낌이 온다.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이 있을 거야.’  


  엄마들과의 채팅 창에서는 하나둘씩 한탄이 흘러나왔다. 대부분 중국 유치원을 다니고 있어서 일단 그 사이 중국어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가정보육의 고됨에 대한 한탄, 언제까지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우려들이 터져 나왔다. 결국, ‘며칠 전까진 정말 행복한 거였네요.’라는 말이 내 손가락에서 튀어나오고 말았고 대화는 거기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자기 전 문득, 무심코 흘러나왔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실제로 갑작스러운 통보에 당장 막막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안쓰럽기도 해서 마음이 복잡했던 차였지만, 행복이란 단어를 운운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고 사실 그 정도의 마음도 아니었다. 그때는 행복했고 이제부턴 행복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물론 전혀 없었다. 그냥 맞장구치다가 정말 무심코 흘러나온 말이었다.


‘(알고 보니) 그때가 좋은 거였어.’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한 거야.’

시간에 대한 비교 우위든, 타인에 대한 비교 우위든, 아니면 단순한 습관이든, 꽤 자주 쓰이는 표현들이다. 당장 코로나로 인해 당연했던 일상을 누리지 못하는 지금 ‘평범한 일상이 정말 소중한 거였어.’라고, 전업맘은 ‘그래도 내 직업이 있었을 때가 좋았지.’ , 티브이 속 드라마 주인공을 보고는, ‘저 정도에 비하면 난 정말 행복한 거야.’라고들 한다. 친구는 부부싸움을 심하게 한 날엔 ‘이 남자가 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렇게 복작대는 것도 행복이다.’라고 생각하면 화가 풀린다고도 했다.


  보통은 자신보다 더 나은 상황과 비교하며 현재를 비관하는 ‘상향 비교’가 더 많은 듯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보며 현재에 안도하고 감사하는 ‘하향 비교’로 심리적인 탈출구를 찾는 경우도 많다. 지금의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이 있음을 내려다보며 현재에 감사하는 것은 심지어 꽤나 긍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종교인이라면 아마 매우 익숙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무늬만 가톨릭 신자이지만, 시댁 가족 분들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시다. 명절날 음식 준비로 분주한 식탁 유리 밑에는 대충 이런 내용이 적힌 종이가 깔려 있었다.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맛있는 한 끼 식사가 있고 몸을 따뜻하게 해 줄 옷 한 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결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댁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감사합니다’이다. 물론 그런 종교적 글귀의 본질은 이타적인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타적인 마음과, 하향비교하는 마음의 선이 불분명해보일 때가 있다.


  실제로 시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어르신들의 얼굴 모습은 찡그림의 흔적 하나 없이 환하시다. 올해로 아흔일곱이 되신 할머님도 귀가 잘 안들리시는 것 말고는 지병 하나 없으시다. 아마도 항상 감사하는 긍정적인 마인드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힘든 세상 살아가며 내 마음 하나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뭔들 마다하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긍정적인 마음이 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그리고 그 작은 파급력 같은 것을 옆에서 보아왔고, 분명 본받을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떤 사람에겐 그저 본받을 일이 아니라, 쓰러져가는 영혼을 살리는 마인드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마음을 경계한다.


감사함을 가지는 마음은 참으로 소중하지만, 소중하기에 그 무엇과도 비교하고 싶지 않다. 나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고 안도하면서 현재에 머물러 있고 싶지도 않다. 누군가는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지만, 부러우면 먼저 같은 배를 타고 따라갈 용기가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나의 자리에 꼼짝 않고 발 딛고 서서 옆만 곁눈질하며 바라보는 건 한쪽으로 치우친 왜곡된 시선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사실은 나부터도 내가 발 딛고 있는 자리에서 무언가를 한탄하기 바쁠 때가 많고, 눈 씻고 찾아봐도 도저히 감사함이란 찾을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도 있다. 지금과 같이 코로나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외국에 살면서 1년째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참으로 한탄할 거리가 많다. 그리고 곧이어 곁눈질을 하며 안도할 거리를 찾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도 여기는 한국만큼 환자가 많지는 않잖아, 그래도 여긴.. 그래도 나는...


한 연구에서는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자기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보고 자신의 상태와 비교하게 했는데 환자들의 부정적 정서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반면 자기보다 더 나은 상태의 환자들과 상향 비교하게 했을 때에도 불편감이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환자들의 경우도 일반인들처럼 자기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보며 안도감을, 자기보다 상태가 좋은 사람을 보며 불행을 느끼곤 하지만, 자기보다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볼 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또 상태가 좋은 사람을 볼 때 역시 나도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의 경우 옆에 있는 사람의 불행 또는 행복이 자기 자신과 유리된 단순 비교 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건강심리학 리뷰지(Health psychology review -

무의식적인 비교를 통해 순간적인 안도감이나 불편감을 마주하는 일보다는, 그 누군가와 잠시나마 한 배를 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와 나란히 서있는 이들 외에, 세상 어디엔가 누구에겐가 일어나는 동떨어진 일들에도, 그 자체로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 좋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는 그때 나름 좋았던 것들이 있고 지금은 지금 나름의 좋은 것들이 있다고 진심으로 여길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다행히 책을 읽고 소설을 읽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를 나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게 해 준다. 힘들고 절절한 인생, 손가락질받는 인생, 또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반짝이는 인생, 그 안에는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흐른다. 책뿐만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도, 좋은 이야기를 만났을 땐 독자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 될 수 있다면 비교 따윈 필요 없다. 공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일련의 흐름 끝에,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땐 어쩐지 나의 모습이 조금은 선명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 나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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