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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Oct 15. 2020

예측 가능한 오늘의 기적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추측만이 존재했던 세상의 모든 일들을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의 노력대로 우리는 어느 정도는 불확실성이 통제되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고 불확실성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의 본능이다.

“우리는 시간에 구속된 동물이기에 미래를 걱정한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하게 의식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며 이에 따라 현재의 행동을 결정한다.”  -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中-


그리고 그러한 통제를 위한 노력과 갈망이 아주 희박한 확률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기적’이라 일컫는다.  


영혼의 짝을 만나게 될 기적

시험에 통과하게 될 기적

코로나가 사라지게 될 기적..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은 보통 이런 것들이다.


‘반짝하고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그런 어감과는 달리 진짜 기적다운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열정이 더해진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고,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서 버리는 카드를 만들어야만 할 때도 있으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그러한 기적이란 아주 소량이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예측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큰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고 때론 갈망하기도 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측 가능한 범주에 끼어넣는다.


반대로, 기적의 반대편에 있는 ‘절망’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 역시 인생에서 비슷한 확률로 일어난다. 아무 노력도, 갈망도 없이 오직 확률로만 이루어지는 ‘절망’

절망은 왜 그토록 절망스러운 것일까?
바로 예측 불가함 때문 아닐까?


그 확률만큼은 피하기 위해 실패를 돌아보고 준비하지만 주사위의 한 면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절망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굳이 지나간 역사 속의 일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바이러스 시대는 끝났다는 믿음을 저버리며 코로나 역시 그 어떤 예고 없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인류의 노력을 배신하듯 ‘기적’과 ‘절망’은 여전히 같은 확률로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 나는 참으로 예측 가능한 삶을 살아왔다. 커다란 기적도 절망도 없이,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왔다. 부모님은 내 인생에 혼돈 속 질서를 만들어주기 위해 무던히 애쓰셨고 나는 매끄럽고 잘 닦인 길을 열심히 걸어오는 것 외엔 할 줄 몰랐다. 옆길이나 주변 풍경 같은 것들을 넋 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것들이 좋은 줄도 물론, 몰랐다.


그렇게 살아온 나는 예측 불가한 것이 싫었다. 남편과 신혼 때 스페인 여행을 갔던 때였다. 모든 여행 계획과 일정 관리는 내 몫이었다. 뭐든 즉흥적이었던 남편에게 불만이 쌓여서 하루는 나도 계획이고 뭐고 아무 생각 없는 여행을 하고 싶으니 알아서 하라는 나름의 폭탄선언을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나는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늦잠을 잤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비행기를 놓쳤다. 뒤늦게 여행 계획을 뒤적이던 남편은 당황해하며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부랴부랴 공항으로 갔으나 놓친 비행기에 대한 금액은 환불받지 못했고 그다음 편 비행기의 남은 자리를 겨우 잡아타고 나서야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다. 여행 기간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지만,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하루 종일 놓친 비행기에 연연했고 그 날 하루의 일정을 한 순간도 즐기지 못했다. 그 날의 여행을 망쳐버린 건 비행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던 나 자신 때문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예측 불가함’에 던져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곧이곧대로 앞에 놓인 길만 열심히 걸어온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모든 부모들은 알 것이다. 육아가 얼마나 예측 불가한 것인지.


둘째 아이가 두 돌 정도 되었을 때,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둘째와의 하루를 시작하던 어느 날이었다. 두 아이를 챙겨 먹이고 옷을 입히고 간단히 씻겨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날따라 나는 선크림은 고사하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대충 잡히는 옷을 걸치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줬다. 초겨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중국 선양의 초겨울이란 몇 번을 겪어도 몇 번이나 당혹스러운 그런 계절이다.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는 날씨의 속도에 여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그런 지극히 평범한 초겨울의 어느 날, 나만의 절망은 찾아왔다.


아파트 안에 들어서며 나는 가방에서 열쇠를 뒤적였고 그걸 본 아이는 눈이 반짝였다. “내가 할 거야”

엘리베이터 안에 카드를 대야 우리 집 층 버튼을 누를 수 있었는데, 카드를 대면 ‘띠’ 소리가 났고 그다음 버튼을 누르면 불이 켜졌다. 아이는 그것을 무척 좋아했다. 형아가 있을 땐 순서를 뺏기기도 했었던 터라 나는 너그럽게 아이에게 열쇠가 달린 엘리베이터 카드를 건네주었고 아이는 신나서 그걸 낚아챘다.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은 열렸고 아이는 뛰어들어가며 그만 손에서 카드를 놓치고 말았다. ‘쨍’


열쇠는 단 한 번의 ‘쨍’ 하는 경고음을 내며, 마치 흘러들어 가듯 정확한 각도로 엘리베이터 바닥 틈 사이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열쇠와 카드, 그리고 ‘멘붕’. 그저 그런 일들도 예고 없는 갑작스러움을 만나면 그 순간엔 충분히 절망이 되어버릴 수 있다. 적어도 그 순간 그건 나에게 절망이었으니. 밖은 추웠으며 나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꼴을 하고 있었다. 급하게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했지만 출장 중이었던 남편은 아파트 관리사무실 전화번호만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었다. 전화해보니 다행히 두세 시간 정도 기다리면 관리실 직원들이 와서 열쇠를 꺼내 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짜증 났던 나는 아이에게 열쇠를 떨어뜨리면 어떡하냐고 앞으로 다시는 너 혼자 열쇠 가지고 있는 건 안된다며 아이를 혼냈다. 열쇠를 아이 손에 기꺼이 쥐어줬던 건 바로 나였는데도 말이다.


두세 시간 정도를 놀이터에서 보냈을까. 연락을 받고 돌아와서 받은 열쇠에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먼지 한 올 묻어있지 않았다. 물론 반질한 금속과 플라스틱에 먼지가 달라붙을 리도 없었지만. 그건 변함없이 제 기능을 하는 이전과 같은 카드키였다. ‘띠’ 소리가 났고 버튼에도 환한 불이 켜졌으며 그걸 본 아이는 열쇠를 손에 들고 웃었다. 그렇게 처음 모습 그대로였던 반질한 카드키와 아이의 웃는 모습에, 방금 전까지 한껏 구겨져있었던 내 얼굴이 겹쳤다.

나는 아이 손의 열쇠를 뺏지 않았고, 대신 열쇠를 쥔 손을 놓치지 않게 두 손으로 꽉 잡고 발 밑을 잘 보고 타라고 아이에게 일러주었다.


그 후, 일상에서 예고 없는 무언가가 나를 괴롭힐 때마다 나는 이 카드키를 생각한다. 바닥까지 갔다 왔어도 먼지 한 톨 없었던 그 반짝이는 카드키를.


  나는 카드키와 함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있다는 인생의 작은 진리를 함께 건져냈던  아닐까. 바닥을 찍고 올라와도 그대로일  있는 기적.

진짜 절망 속에서도 기사회생하는 기적을 이뤄내는 사람들을 보며, 내일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예측 가능한 오늘의 기적을 만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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