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새벽이다. 나는 새벽을 잘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아침의 새벽. 지금까지 새벽 5시라는 시간에 눈을 뜨고 있어 본 적은 정말이지 손에 꼽는다. 중학교 때부터 새벽 한 시, 두 시까지는 깨어있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거의 눈을 감은 채로 아침을 쑤셔 넣고 등교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즈음부터 몸은 꾸준히 그런 시간의 리듬에 맞춰져 왔다. 새벽 기상을 해야 했을 때는 대학교 때 엠티, 혹은 여행 갔을 때, 누군가와 동행하는 스케줄에 맞추기 위해서 뿐이었다. 회사 다니면서는 가끔 밤샘 촬영을 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촬영이 다 끝나면 새벽 3시 아니면 5시가 다 될 때도 있었다. 밤샘 촬영은 가끔이었고 특유의 그 분위기를 즐기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나의 저질 체력에는 폭격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새벽의 고요한 기운을 받아들이기엔 담을 곳 없이 반쯤은 정지되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런 내가 새벽 기상에 귀를 솔깃하게 된 건 최근이다. 아마도 최근 들어 나처럼 솔깃하지 않은 사람도 별로 없어 보인다. SNS를 보면 모두 새벽 기상 인증을 하고 있고 브런치에만 해도 새벽 기상해서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도 많아 보인다. 새벽에 일어난 바깥 풍경, 선명하게 찍힌 새벽의 시간들을 보며 궁금했고 그 느낌, 그 시간을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들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이기도 하고, 회사에선 직급이 있지만 그냥 나 자신이기도 하고, 마치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냥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그런 시간 말이다.
‘가지고 싶으면 가지면 되지~’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가지고 싶다고 가지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핑계인 것 같은 말도 당사자에겐 흔들릴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가 새벽 기상을 하지 못했던 이유 혹은 핑계는 ‘건강’이었다. 어렸을 때 만성 두드러기를 앓았었다.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갑자기 빨간 두드러기가 피부에 돋아나고 간지러워 여러 번 조퇴하기도 했고, 한밤중에 온 몸으로 퍼지는 두드러기 때문에 부모님이 나를 들춰안고 응급실 갔던 기억도 어렴풋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무 이유 없이 돋아나던 두드러기는 아무 이유 없이 곧 멈췄고 나의 뇌리에서도 사라졌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보통의 20대들이 그러듯 팔팔한 젊음 하나 과시하며 살았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조금 불규칙한 식사, 조금 불규칙한 생활도 가끔 했다. 그리고 그런 나의 20대가 끝나갈 즈음 무언가 내 안에서 반항이라도 하듯 그 끔찍한 두드러기는 다시금 터져 나왔다. 회사 일도 바빴고 마침 결혼 준비도 하는 중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극심한 간지러움 때문에 그때마다 일상은 정지되어야만 했다. 일시적으로는 항히스타민제로 억제할 수 있었지만 계속 약을 복용하는 건 내 몸이 그 빨간 괴물에게 잠식되어버리는 걸 허락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였다. 원인도 없었고, 병명은 ‘만성’ 두드러기였지만 그 ‘만성’이 한 번 감쪽같이 사라졌던 경험을 했었던 나는 이번에도 그것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면역력의 문제였다. 급할 땐 약으로 버티다가 전국의 한의원을 수소문해서 한약을 지어먹었고, 최대한 식습관, 생활 습관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결혼 전에 두드러기는 내 몸에서 자취를 감췄고 지금까지 나를 또다시 괴롭힌 적은 없지만 면역력이 약해지면 언젠가 또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한다. 멀쩡한 몸뚱이가 무형의 어떤 것에 지배당하는 것 같은 순간의 무력감 또한 잊지 못한다.
그렇게 아주 작은 건강의 이상 신호가 익숙한 일상을 통째로 흔들어버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내 손에 쥐어진 주방 도구들을, 식재료들을 나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여긴 중국이고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고 싶으면 내가 직접 해 먹는 수밖에 없다. 친정엄마의 음식 솜씨도 그림의 떡이다. 해외에 살면서 식재료 구하기 힘들 때도 있고 어린아이 둘 키우면서 내 손으로 꼬박꼬박 밥 차려먹기란 현실보단 이상에 가깝지만, 때론 밥만 잘 차려먹어도 구질구질한 것만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찌 보면 현실을 이상과 가깝게 만드는 기본 조건이 나에게는 건강과 체력이었다.
그렇게 지금 나는 매 끼를 사람답게 차려먹으려 하고 아이들과 온몸으로, 몸이 아니면 온 성대를 다해 놀아주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사이사이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거나 쪽잠을 잔다. 적어도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는, 솔직히 지금 나에게 이런 생활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는 없다. 브런치 조차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지극히 평범한 엄마의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눈떠서 잠들 때까지 내 안의 열정 비슷한 것들을 풀가동하는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없는 시간 쪼개 새벽에 쓰기 시작하다가 잠에서 깨어난 아이의 발소리에 멈추고, 또 아이들 잠든 시간에 들춰보다가 한 줄 적어보고, 오늘은 마무리해야지 싶어서 이 밤에 또 한 줄 적다 보니 글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쓰는 속도가 더딘데, 술술 써 내려갔던 적은 거의 없는데, 그런데도 내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산더미 같은데, 도대체 언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 새벽 기상 그까짓 거 해보지 뭐. 최근 일주일 동안 매일 아침 5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기 시작했다. 두 번은 일어났고 세 번은 일어나지 못했다. 미안해. 얕잡아봐서. 나의 의지를 좀 더 얕잡아봐야 했을 것을.. 그래서 ‘의지’가 아닌 ‘욕구’를 통한 내면의 조종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자기 전 침대 옆에 노트북과 보온 주전자를 세팅해 놓는다. 보온 주전자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차를 가득 우려 넣는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다시 눈을 감고 싶은 욕구보다 저 주전자 안에 든 걸 마셔야겠다는 욕구가 돋보이도록,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또 눕고 싶은 욕구보다 옆에 놓인 키보드에 손을 두들겨서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고 싶은 욕구가 돋보이도록..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건 정말이지 간단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