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혼이었고 친구들은 미혼이었다. 여자 친구 넷. 여자 넷이 모였어도 참 둥글었다. 여자들끼리의 모임에는 간혹 보이지 않는 시샘이나 질투들이 끼어들었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의 줄이 당겨졌다 느슨해졌다를 반복하곤 한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그런 팽팽한 줄이 없었다. 그 안에는 줄을 놓고 마음껏 풀어져도 괜찮은 무언가가 있었으며, 어른이 되지 않은 여자아이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연애의 연장선상이었고, 결혼은 했지만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더 많았고, 엄마와 아내보다는 여전히 부모님의 큰 딸이 더 익숙했었던 그때. 남편과 간단한 아침을 함께 먹고, 함께 출근길에 오르고, 퇴근길에 만나 외식을 하거나, 어설픈 집밥을 차려먹거나, 주말엔 양가 나들이를 하거나, 친구들과 이전처럼 약속을 잡아 만나거나. 그날도 그랬다.
크리스마스 즈음의 연말 공연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맘마미아 내한 공연.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잡아 고대하던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갔었다. 연극이라면 조금씩 다르겠지만, 뮤지컬을 보는 마음가짐이라 함은 크게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무대 위의 노래와 춤, 그리고 감탄. 뮤지컬에 대해 그 외 어떠한 특별한 깊이도 가지지 못했던 난 그저 뮤지컬을 둘러싼 것들이 좋았다. 조금 아니 한껏 멋을 내고, 적지 않게 지불한 좌석에 앉아(그래도 2층이었지만), 어둠 속에서 환한 무대를 바라보는 것, 설렘과 키득거림, 배우들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이 곳이 서울인지 브로드웨이인지 분간되지 않는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그 모든 것들을..
그때 나는 딱 서른이었다. 비현실적이고도 현실적이었던 서른.
지금 돌아보면 서른의 나는 결혼 전의 현실과 조금씩동떨어지기 시작했고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현실과는 더욱 동떨어져 있었다. 1년 후 일을 그만두고 중국에서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는 것이 삶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도 감이 없었다. 폭풍 전야 같이 평온했던 나의 서른은 흘러가는 시간에서 동떨어진 채 지금도 나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빛을 내고 있다. 어디선가 아바의 노래가 들려올 때면 여전히, 환한 무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며, 곧바로 그림같이 펼쳐지는 몇몇 순간들이 있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들도 시간이 지나면 스토리가 헷갈리거나 누구랑 봤었는지 기억이 안나기도 하는데, 뮤지컬은 다른 모양이다. 아마도 보다 다양한 감각들이 나를 일깨웠었으리라.
‘맘마미아’는 스무 살 된 딸이 결혼식을 위해 엄마의 일기장을 보고 아빠를 찾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을 그린 이야기이며, 아바의 음악들로 만든 팝 뮤지컬이기도 하다. 시작부터 무대는 아바의 흥겨운 멜로디로 가득 찼다. Dancing Queen, Honey Honey 같은 곡들이었고, 그건 어디서 들어본 듯 들어보지 못한 노래들이었다. 90년대 가요나 팝송이 익숙했던 내게 ‘ABBA’는 확실히 거리감이 있었다. 단순했지만 신선했다. 멜로디 자체에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초반의 흥겨웠던 음악이 조금씩 잔잔해질 즈음 나는 갑자기 울컥해버렸고, 얼굴을 다 덮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대에서는 ‘Slipping through my finger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친구들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렇구나.’ 라며 나를 토닥거렸고, 나는 빨개졌는지 어쩐지도 모르는 눈을 가리려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Slipping through my fingers. 엄마가 딸인 소피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뜻. 친구들 말처럼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었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더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엄마와 나는 서로를 손가락 사이로 밀어내기도 하고 또 빠져나가기도 했다. 엄마와 딸은 애증의 관계라고도 하고 친구 같은 관계라고도 한다. 나는 항상 애증의 관계에 서서 친구 같은 관계를 부러워했다. 어렸을 땐 엄마가 너무 무서웠고, 조금 컸을 땐 어색해져 버렸다. 동생은 엄마에게 뭐든지 다 말할 수 있었지만, 나는 엄마가 듣고 싶어 할 말만 가려서 했다. 뭐든 엄마 마음에 드는 걸로 했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심지어는 신혼살림도 마음에 안 드는 그릇도 엄마가 신나서 고르면 나도 좋다고 했다. 상당히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엄마 말대로라면 엄마랑 나는 상극이기 때문이었다. 엄마랑 저 멀리 반대편에 서 있었던 나는 외나무 끝에 서서 그보다 더 멀어지거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내 나름의 안간힘을 썼다.
이미 벌어진 틈 사이로 빠져나가버린 모래알 같은 관계는 아무리 손으로 움켜쥔들 쉽게 쥐어지지가 않는다. 모래시계는 모래가 다 떨어지면 거꾸로 방향을 바꿔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생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중력에 힘입어 바닥으로 떨어지기만 할 뿐, 흘러나온 모래를 주워 담을 방법은 없다. 그 날,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빠져나가버리는 그 무언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무력감을 느끼며, 이제 더 이상은 주워 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들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엄마 역할을 맡은 배우의 목소리로 부르는 엄마의 마음이 들렸다. 엄마도 나 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손에 쥐지 못했었겠구나..
처음으로 혼자 책가방 메고 웃으며 등교하던 어느 날 아침.
교복 입고 학교 가기 전날 설레는 마음으로 미리 입어보고 사진 찍던 날.
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말이 익숙했던 날들.
갖고 있던 물건들을 신혼집으로 옮기려고 정리하던 어느 날 밤.
네 년이랑은 연을 끊어야겠다는 말을 들었던 어느 날
뜬 눈으로 흘려보냈던 그 모든 순간들을, 나는 그 날 그 무대 한편에서 보았다.
그리고 내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아픔 뒤에, 항상 내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던 엄마를 보았다.
빠져나가는 것들을 의식조차 못한 채 속수무책이었던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간다. 바다 건너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지금은,시간과 공간의 공백에 속수무책이 된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했지만, 이것 역시 매 순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빠져나가버리곤 한다. 이미 많은 것을 흘려보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눈 앞에 있는 소중한 이 시간들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은 채 시간의 흐름에 맞춰 흘러가고자 한다. 뜬 눈으로 흘려보냈던 신기루 같은 희미한 감촉 대신 아름답고도 살아있는 현재의 질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Slipping through my fingers. (from Mamma Mia!)
Schoolbag in hand she leaves home in the early morning
Waving goodbye with an absentminded smile
I watch her go with a surge of that well known sadness
and I have to sit down for a while
The feeling that I’m losing her forever
And without really entering her world
I’m glad whenever I can share her laughter that funny little girl
Slipping through my fingers all the time
I try to capture every minute
The feeling in it slipping through my fingers all the time
Do I really see what’s in her mind
Each time I think I’m close to knowing she keeps on growing
Slipping through my fingers all the time
Sleep in our eyes her and me at the breakfast table
Barley awake I let precious time go by
Then when she’s gone there’s that odd melancholyc feel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