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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Feb 22. 2021

평범해져 버렸어


결혼 후 중국에 살게 되면서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한국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만난다. 그리고 부모님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중국에 오셔서 지내고 가시기도 한다. 물론 코로나 전 이야기다. 중국에서 설을 보내며 지난 명절들을, 보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한 번 가면 한 달 정도 머물다 오긴 하지만 횟수로 따지면 일 년에 두 번이니, 총 날짜 수가 아닌 방문 횟수가 먼저 다가온다. 자주 보지 못한다는 생각, 소중해진다는 생각. 엄마와 딸은 가끔 투닥거리기는 해도, 가끔 서먹함이 감돌기는 해도, 그래도 나는 그 사이에 있는 애틋한 감정들을 보곤 한다.

동생네 가족까지 모여 식사 준비를 거들고,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면 다 같이 둘러앉아 티브이 앞에서 과일을 깎아먹는 풍경. 남편도 한국에 와 있었고 아이들 둘은 까르르 웃음을 보탰던 어느 날. 오랜만에 손주들을 보는 부모님 얼굴의 주름 사이사이가 활짝 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참고로 우리 남편은 사랑받는 사위다. 남편이 친정집에 오면 부모님은 말이 많아지신다. 무뚝뚝한 딸 하고는 별로 얘기가 이어지지 않는데 남편이 오면 아빠는 술 한잔 곁들여 이 얘기 저 얘기하시느라 오랜만에 신이 나신다. 엄마도 남편이 뭐만 하면 칭찬 일색이다. 짐을 싸면 잘 싼다고 칭찬, 밥을 먹으면 잘 먹는다 칭찬, 부모님이 이렇게 말씀이 많으시고 칭찬을 잘하시는 분들이었는지 남편을 보고 새삼 깨닫는다. 나는 부모님 속을 썩여드리는 못난 딸인 적이 많았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깨닫는다.  그리고는 나를 둘러싼 얼굴들에 감사하게 된다. 부모님께,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이 못난 딸은 남편과 아이들에 편승하여 다가갈 뿐이다.

그렇게 모였던 어느 날엔가, 첫째 아이가 글씨를 읽기 시작했던 그 시기, 아빠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첫째 아이는 꽤 일찍부터 문자에 관심이 많았고 빨리 깨우쳤다. 두 돌 되기 전 장난감에 붙어있는 알파벳 스티커를 보고 놀다가 알파벳을 다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두 돌 반 정도부터 책을 읽어주면 문장을 통으로 외워서 혼자 읽어내기도 했었다. 나도 아이가 신기하고 기특했지만 그 당시 친정부모님이 정말 많이 좋아하셨다. 아이가 영특하다며 문득 다 같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아빠가 말씀을 꺼내셨다.


"도원이가 어렸을 때 다섯 살 때부터 혼자 책을 다 읽었어."
엄마도 옆에서 거든다.

"처음에 혼자 책 들고 읽고 있어서 보니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외워서 읽지 뭔가."

“그렇게 외워서 읽다가 한글은 절로 뗐지.”
남편 왈

"우리 현이가 엄마 닮았구나."
나는 속으로 싱글벙글했던가 멋쩍었었던가.

곧이어 아빠의 한마디
"근데 평범해져 버렸어. 엄청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하하하 아빠는 정말로 크게 웃으셨다.

나는 같이 입을 헤 벌렸다 오므렸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입을 벌려서 웃는 입을 만들었다. 눈동자가 흔들릴세라 고개를 떨구었지만 입꼬리는 조금 비죽거렸던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런 류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건 아니다. 남편도 아이들도 동생네도 다 같이 앉아서, 너희 뒷바라지하느라 들인 돈만 해도... 땅을 팔았고... 나는 옷 하나 쉽게 안 샀는데 얘네들은 다 백화점 가서 사 입혔고..  그런데!

아빠가 하신 말씀은 사실 그 웃음과 마찬가지로 어떤 깊은 의미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빠 사람은 조금 단순하고 순수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말 언저리에 있는 다른 감정이나 뜻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내가 평범하다는 것은 사실이기도 했고 평범한 삶에 대한 불만도 없다. 또한 부모님이 쏟아부으셨던 오랜 기간의 노력과 그 가치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내가 이렇다 저렇다 논할 수는 없다. 나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내가 겪어보지 않은 조금 다른 삶에서 녹아들어 온 결정체, 삶의 방식이기에 존중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에겐 온전한 나의 인생으로부터 출발한 나만의 관점이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평범해져 버렸다'는 별 것 아닌 말은 꽤 오랫동안 마음에 살짝 박혀서 가끔 아렸다. 비수는 아니었지만 불편한 얼음조각이었다. 언젠가는 또다시 흔적도 없이 녹아버릴 테지만 분명한 날카로움을 갖고 있는 아주 작은 얼음 조각.





나는 평범함을 사랑한다. 내 주변에 널려있는 나의 평범한 것들을 마음 한가득 담아 사랑한다. 아이와 아이처럼 노는 것, 방금 내린 커피 한 잔의 향기,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을 바라보는 일, 퇴근할 때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편의 웃는 모습, 우리 넷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울퉁불퉁한 그림자 같은 것들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좋아한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삶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들에게만큼은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건 나의 욕심일까?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니야.
누구든지 최소한 누군가에겐 특별한 존재여야만 .

세상이 바라보는 눈으로 나의 특별함을 바라봤던 때가 있었다. 한 사람의 특별함은 세상이 가진 선 안에서만 빛을 발했고, 그 선을 밟고 넘어가는 순간 빛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아마도 그 선 안에 있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었지만 빛을 발할 것이라 여겼던 그 선 안에서 나는 끊임없이 나의 빛이 무엇인지를 의심해야만 했다. 스스로 나는 빛나는 사람이라는 주문을 외우다 오히려 내면의 어둠 속으로 되려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만 같았던 시간들. 인간이란 홀로 빛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이의 눈으로 자신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안타깝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어느 날들을 떠올린다.


지금 나는 나의 눈으로 ‘너와 나’의 특별함을 찾아가는 중이다. 내가 진심을 다해 아이들을 들여다보고 사랑하는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가끔 욱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선한 우리 남편도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아이들에게선 특별함보다 평범함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다.


언제쯤 나는 마음껏 홀로 서서 나의 빛에 연연하지 않은  다른 이의 빛을 보아줄  있을까도 생각한다. 그렇게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눈이 세상 어딘가로부터 세뇌된 제3의 눈이 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섬뜩하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나의 눈으로 바라  있을 때야 비로소  어떤 빛도 소멸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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