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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Mar 03. 2021

감정 분리수거

매일 느끼는 것들

감정 쓰레기통이란 말이 있다.

으레 그렇듯 어디서 처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탁월하다. 감정과 생활용품의 조합이라니! 흔한 두 단어의 조합으로 많은 감정들이 파생된다. 쓰레기통의 역할을 맡은 자의 책임감, 버리는 자의 더러운 감정, 쓰레기를 버리고 나서 뚜껑을 닫은 후의 말끔함, 그리고 시간이 지나 뚜껑을 열어봤을 때의 악취.


쓰레기통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산뜻한 색깔에, 기능도 여러 가지인 신제품들이 가득하다. 수식어로는 ‘쾌적한’, ‘상쾌한 공간’ ‘깔끔’ ‘스마트’ 등이 자주 눈에 띈다. 쓰레기통에 더러운 것이 머물더라도, 보는 이에겐 깔끔해 보이며, 함께 하는 공간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생활의 편리를 위해 원터치, 무소음, 자동 인식 등의 기능이 더해진다.


감정을 담는 기능도 쓰레기통처럼 그렇게 진보할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퉁.

나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어. 퉁.

받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어. 퉁.


그렇게 담아둔 감정은 어떤 기능으로도 결코 분해되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쓰레기통밖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마음 한 구석에서 썩지 않는 플라스틱처럼 반영구적인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 누군가 아직도 그 감정이 남아있냐고 비난하거나, 꽁하다고 뒤끝 작렬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쓰레기일 뿐이다. 만일 그런 쓰레기들을 비우지 않은 채 살아가다 언젠가 열어보게 된다면 그때는 악취에 정신이 혼미해질지도 모른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는 실로 여러 가지 감정이 든다. 일상이 바쁠수록, 정신없을수록 하루 중 모처럼 맞는 적막한 시간에 온갖 감정들이 몰려온다. 슬프거나 기쁜 것을 제외한 그저 그런 평범한 감정의 날들도 이를 비껴갈 수는 없다. 무념무상이란 쉽게 이룰 수 없는 경지가 아닐까.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조금 묵직한 감정들까지 뭐가 그리 가득 차 있는지 하나, 둘 너도 나도 꺼내 달라 아우성이다.


[오늘의 시시콜콜한 감정]

#1. 아이 유치원에서 학부모 면담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다녀왔다. 발전하지 않는 중국어로 더듬더듬, 무뎌져 가는 영어로 말을 이어가다가 마음속에서 작은 좌절이 일어났다. 영어를 참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것을 잃어가고, 의무만 더해가는 삶이 아닐까 생각하다 좌절감에 약간의 슬픔이 더해졌다.


#2.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아이에 대한 감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어느 정도는 다르겠지만, 중국의 선생님들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는다. 물론 서로 예의는 갖추지만 유치원에서도 교직의 권위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땅하지만 익숙하지는 않았던 느낌.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는 좀 달랐다. (중국 선생님뿐 아니라 영어 선생님의 의견이 반영되었다.) 첫째 아이가 다른 남자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첫마디를 듣고 헉했는데 막상 들어보니 자동차, 로봇만 좋아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책을 골라도 플롯이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웃긴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만 항상 감정 컨트롤을 잘한다. 어려운 과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들 행동의 표준이 된다는 말씀이었다. 너무 소중해 마음에 꼭 담았다. 장점이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장점을 봐주신 선생님께 감사했다. 둘째 아이 선생님도 반 아이들 전원이 모두 가장 좋아하는 친구로 우리 민이를 꼽았다고. 타지에서 누구의 손에도 맡기지 않았던 나의 선택에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했던 육아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나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았던 우리들이 조금씩 함께 성장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던 시간. 두고두고 간직해야지.


#3. 이번 주로 밀린 약속들이 두 건 있다. 하나는 기다려야 하고 하나는 내가 먼저 잡아야 한다. 약속을 잡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일이 점점 간단해지지 않는다. 해외에 살며 많은 도시들을 옮겨 다니다 보니 만나고 헤어지는 인간관계에 조금은 회의적이게 된다. 게다가 관계는 주로 아이들 친구 엄마로 제한되고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설렘’이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4. 여전히 글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나에게도 가장 하고 싶은 것, 가장 잘하고 싶은 것. 그리고는 자신 안에 담긴 열망 비슷한 것을 꺼내 보이는 사람들을 본다. 아, 사실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발걸음을 떼는 일. 나는 내 안의 무엇을 꺼내서 보기가 두렵다. 그냥 편편하고도 매끈한 모양새로 담백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문득 그렇게 살다가 매끈한 달걀흰자 같은 삶이 되어버리는 것 아닐까, (달걀 귀신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익다 만 반숙 노른자라도 한 번 베어 먹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야만 너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퍽퍽한 생각.




그때 그때 버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쓰레기라 여겼던 내 안의 감정 찌꺼기가 때로는 훌륭한 재활용이 되기도 한다. 무분별하게 버릴 필요도 없고 한꺼번에 다 담으려고 너무 애쓸 필요도 없다. 오늘의 소중한 감정은 언제든 볼 수 있게 꺼내놓고, 당장 버리고 싶은 감정들 역시 면면이 살펴 한쪽에 분리해놓기로 한다. 어떤 고민들은 버리지 않고 잘 분류해 놓으면 꽤나 생산적인 재료가 될지도 모른다.


퉁, 퉁, 퉁. 감정들을 분리하여 담아본다. 버려야 할 감정은 무엇인지, 버리지 말고 품어야 할 감정은 또 무엇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나 미움의 감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들여다보니 없다. 잘 버렸구나. 하하. 설마 어딘가 엄한 곳에 버려서 썩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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