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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pr 03. 2021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깜깜한 긴 터널 끝에서 다가오는 띠링띠링 소리와 불빛,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한국의 지하철보다는 훨씬 여유롭지만 그래도 지하철은 지하철이다. 어느 도시를 가든, 역 이름을 확인한 후 목적지를 향한 플랫폼에 서 있으면 된다는 본질은 같아서일까, 지하철에는 어딘지 모를 익숙함과 안정감이 있다.

중국 심양의 지하철


중국에 처음 왔을 땐 개찰구에서 현금을 내고 교통카드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누구도 대면할 필요 없이 자동화 기기에서 웨이신으로 결제할 수 있다. 편리하지만 점점 외로워진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옷깃을 스칠 정도로 가까이 스쳐 지나가지만 서로의 영역에 절대 들어갈 일이 없다.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마주치는 시선을 피해 노선 위의 깜빡이는 불빛을 바라본다. 그때 그 불빛도 이렇게 깜빡였었던가.


공간이 불러오는 기억


[서울역]

나의 20대는 지하철과 함께였다. 4년 내내 한 시간 반 거리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통학했고, 회사 다닐 때도 한 시간 반, 이직 후엔 최소 한 시간 거리를 출퇴근했다. 대학교 다닐 땐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지하철로 갈아타야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서울역엔 노숙자가 많았다. 버스를 갈아타려면 지하철 맨 끝 쪽에 있는 출구까지 긴 통로를 걸어가야 했었는데 거기가 말하자면 노숙자들의 고급 빌라였다. 역 중심부도 아니고 외진 끄트머리 출구 쪽, 길고 긴 통로에는 사람들이 적었고 벽에 붙어 그들끼리 나란히 서로 이웃하기가 좋았다. 늦은 밤에 걸어가야 할 때는 웬만하면 동행하는 사람과 같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는데 고개를 절대 옆으로 돌리지 않았음에도 찐득하게 검은 시선이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그때는 낮이었다. 오전 수업이 일찍 끝나고 오후 일정이 없어 일찍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타려고 출구 쪽을 향해 긴 통로를 걷기 시작하는데, 통로 맨 끝에서 걸어오던, 아니 비틀대던 노숙자 한 명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 탓에 그가 나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다다다다.. 갑자기 왜 달려? 이쪽으로? 설마? 나한테 오는 거야?  몸을 재빨리 피한다고 틀었지만 겁에 질려 굳어버린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노숙자는 주먹으로 벽돌이라도 깨듯 내 팔 한쪽을 옆에서 세게 치고 갔다. 억,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뒤 돌아보면 또 달려올까 봐 그 길로 냅다 달렸다. 대낮에 서울역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몇몇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시선이 머무느라 느려졌던 발걸음을 다시 재촉할 뿐이었다. 다리가 드디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출구 밖으로 향하는 높은 계단을 한 번에 뛰어올라가며 어처구니 없게도 단 한 번의 펀치로 끝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풋풋한 여대생을 향한 펀치는 누구를 향한 울분이었을까, 근거 있는 분노라 하기에도 아까운 한 미친놈의 놀이에 불과했을까?

지금은 깔끔해진 서울역을 한 번씩 지나갈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 많던 노숙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약한 할머니]

할머니는 그 당시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상인 중 한 명이었다. 천으로 된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이쪽 칸에서 저쪽 칸으로 끝없이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게 만원 지하철이었다는 사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사람들 틈에서 그 할머니는 당당하게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커다란 보따리를 옆구리에 탁 걸고 지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보따리를 무기 삼아 지나갈 길을 텄다. 멀리서 보고 아연실색한 사람들은 할머니와 몸이 닿지 않으려고 황급히 옆에 있던 사람을 밀쳤다. 바로 전까지 서로가 유지하던 최소한의 간격이 무너지기 시작하며 한 발짝도 옮기지 못할 것 같았던 빽빽한 공간에 틈이 생겼다. 할머니의 얼굴은 너무 오래 말라서 비틀어진 굴비를 연상시켰다. 이미 말려서 구워놓은걸 남겨서 또 말라버린 그런 굴비. 게다가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지나오느라 여러 번 부딪혔을 너덜너덜함까지 묻어 나왔는데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보따리를 쥔 손과 눈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출근길 지옥철도 모자라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저 고약한 할머니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저 더러운 보따리만도 못하게 보는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할머니가 다가올수록 나는 사람들 틈에 정신없이 밀렸고 급기야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은 손 끝에 매달렸다. 하필이면 그때였다. 할머니가 지나가는 타이밍이! 지갑이며 서류며 책이며 할머니 못지않게 큰 가방을 들고 있었던 나는 나의 가방을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할머니가 그대로 지나가려는 찰나,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할머니 옆에 끼인 가방을 세게 낚아챘다. 으잉? 퀭한 눈으로 앞만 보고 나가던 할머니가 번뜩이는 눈으로 뒤를 홱 돌아봤고 가방의 주인인 나를 목격했다. 하아, 그 고약한 할머니는 지하철 끝에서부터 몇 칸에 걸친 사람들을 치고 지나왔으면서 단 한 번의 ‘치임’을 당했을 때 한없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찰싹~ 할머니는 내 가방이고 등이고 손 닿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다. “고약한 년.”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그렇게 생전 처음 본 고약함이 지하철을 휩쓸고 지나간 후 남은 것들은 모두 내 몫이었다. 애써 모른 척해주는 얼굴들에 왠지 묘한 위로와 응원이 섞여 있다고 느꼈던 건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겠지. 플러스,  그 정도의 고약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걸까



[지하철의 공황]

참 오랫동안 지긋지긋해하면서도 함께 했다. 그 당시엔 지하철 안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아이폰이 나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지금처럼 핸드폰의 용도가 다양해지기 전이었다. 나도 지하철을 타는 시간을 책이나 언어 공부로 채웠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하루 3시간가량을 길에다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운 좋게 앉아서 갈 수 있을 때의 얘기였다. 보통 광역버스를 타고난 후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으므로 버스에서 느꼈던 울렁거림이 지하철에서도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 그 답답함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버스에서 서서 가는 건 지하철에서 서서 가는 것과 비교도 안되게 힘들었다. 원래도 그리 건강 체질은 아니었지만 한창의 20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팔다리에 힘이 없고 골골했다. 그러다 하루는 정말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식은땀이 줄줄 나기 시작하더니 호흡 곤란이 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눈 앞은 하얀 점들과 함께 깜깜해졌다. 그리고 서 있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람들이 놀라서 자리를 양보해 줬지만 남아 있는 정신으로는 내려야 할 것 같았다. 곧 다음 정류장에서 뛰쳐나가듯 자리를 박차고 내렸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의자로 가서 냅다 누웠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보시고는 놀라 달려오셔서 도움을 요청할 연락처를 물었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던 친구가 달려왔다. 친구가 발견한 나는 붐비는 지하철 플랫폼 안의 의자에 대자로 누워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119를 불러 바로 응급실에 실려갈 수 있었다. 식은땀이 나고 어지러운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쓰러지기까지 한 적은 지옥철의 피크를 지나왔던 그 시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토록 숨이 막혔던 건 단순히 지옥철 때문이었을까?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이 정도면 꽤 근사하게 이뤘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출구 없는 지하철의 마지막 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을까.




오랜만에 한가한 이 곳의 지하철을 타다 문득, 나의 그 시절 그 지옥철이 떠오른다. 그렇게 싫어했었으면서 또 그리워지는 건 뭔지.


뭘 하고 싶은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해야 하니까 아등바등하기만 했던 나의 젊은 시절. 그럼에도 풋풋한 열정이 미련함을 앞섰던 아름다웠던 날들.

지질했던 대학시절의 1호선, 목적지 없이 순환하는 지옥 2호선, 허덕였던 출퇴근길의 7호선, 그리고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만나러 가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던 나의 연애를 떠올려 본다.

그렇게 지하철과 함께 달렸던 그리운 나의 청춘이 지나온 자리를 본다.




사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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