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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May 20. 2021

바람 부는 날

유리창 밖의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꺾일 듯 세차게 흔들린다.

유리문 틈 사이로 바람이 휭 들어왔다 나가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

나는 그 틈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발을 내딛는다.

커다란 나무들처럼, 나무들보다 키가 작은 나도 사정없이 바람을 맞는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풀었다 시야를 흐렸다 밝혔다.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강풍.

바람의 존재를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시야는 희미해지고 감각은 선명해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떠오르는 날이 있다.

가슴에는 아기띠로 안은 갓난아기, 한 손에는 장 본 비닐봉지, 다른 한 손에는 엄마 손 꽉 잡은 작은 너의 손.

차가운 비가 조금씩 섞이기 시작하는 매서운 바람은 발걸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내딛으면 된다는 것을 아는 나와는 달리, 아이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으려 했다. 버티고 서서 우는 큰 아이, 품 안에서 꾸벅꾸벅 눈이 감기는 작은 아기.


고개를 들어 분홍색 아파트 건물을 바라봤다. 분홍은 분홍인데 오염되어버린 것 마냥 때가 잔뜩 묻어 있다. 애초에 분홍색이 아니었다면 이것보단 좀 나았을 텐데, 센스도 없지. 콘크리트 아파트와 야리야리한 분홍색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나는 뒤집혀버린 우산을 풀밭에 집어던져 버리고는 쭈그려 앉았다. 집은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었고 더 세차게 내릴지도 모르는 비를 맞으며 언제까지고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업어달라고 우는 아이에게 등에 업히라고 했더니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는 등에 착 달라붙었다. “엄마 꽉 잡아~ “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나에겐 히어로는 없다고 생각했을까. 손목에는 비닐봉지가 대롱대롱, 앞에는 갓난아기가 대롱대롱, 등에는 큰 아기가 대롱대롱. 나는 매달릴 곳이 없어 이만 악 물었다. 빗방울이 조금씩 손에 묻어 미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아무런 틈이 없었다.

아이가 등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나는 아이를 업고 있던 깍지 낀 손을 놓쳤고, 비닐봉지에 담겨 있던 과일과 야채 거리들은 이리저리 굴러갔다.

아이는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고 얼굴을 쓸렸다. 정신없이 들여다본 하얀 얼굴에는 피가 배어 나왔다. 순간, 욕이 나왔지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아이는 사정없이 울음을 토해냈지만, 귀로는 엄마 목소리를 흡수했다. 괜찮다고 했는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부들거리는 손만 다시 놓치지 않은 채 10초만, 또 10초만.. 그리고 아파트 1층에 도착했다. 1층에 있던 어린이집 문을 두드렸고 허겁지겁 동그란 눈을 하고 뛰어나오는 이름 모를 선생님들을 보자 나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아이에게 약을 발라주고, 그 와중에도 잠이 들어버린 품 안의 아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들에게 나는 연신 “셰셰, 셰셰.”라고만 말했다.


아이 얼굴의 푸른 멍과 상처는 서서히 아물었다. 상처는 아물고, 나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그리고 웃었다.


한 달음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누군가에게 달려가 지금, 나,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매달리고 싶었던 마음들.

‘엄마’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버거워서 ‘엄마’에게 기대고 싶었던 나날들.


오늘 같은 강풍이 휘몰아칠 때면, 나 홀로 사정없이 뿌리째 흔들렸던 그 날들이 떠오른다. 그 후 바람이 치고 지나간 그 자리에는 딱 그 만큼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작게 쪼개져버린 그 틈새 사이로 이제는 바람이 아무 소리 없이 지나간다. 조금 서늘할 뿐, 흔들림은 없다.

바람이 지나간 틈 사이로 따뜻한 햇빛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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