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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ug 01. 2021

익숙한 너의 이름

무심코 아이디를 입력하다 손가락이 느려진다. 아이디, 메일 주소 등 여전히 다 같은 이름. 기억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이는 이름.

예전에 키웠던 강아지 이름을 아이디나 이메일 주소로 썼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쓰고 있다. 무심코 누르는 영문 알파벳 조합이 문득 하나의 의미를 가진 소리가 되어 웅얼거린다. 그래 너의 이름이었지, 칭칭.


고 1이었다. 엄마가 너를 집에 데려왔던 그날은.

새하얀 털과 갈색 털이 그려놓은 듯 제 위치에 얼룩덜룩했던 시츄였다. 짙은 갈색 털이 양쪽 귀, 꼬리 등에 색칠이라도 한 듯 반듯하게 자라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개 털 날리는 걸 질색하는 엄마가 미끄러운 바닥에 강아지를 내려놓으며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고~ 얘는 털이 하나도 안 날린다. 강아지는 미끄러지는 발을 떼며 걸으려고 애를 썼다. 그 뒤로도 몇 번 엄마의 전화통화에선가 털이 안 날린다는 장점과 함께, 지독한 사춘기로 말을 안 하는 내가 걱정이 돼서 강아지를 사줬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시츄는 시츄였다. 먹는 걸 보면 환장하고 영특한 개는 아니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덩치는 빨리 커져서 새끼 때의 앙증맞음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내 눈엔 세상에서 가장 예쁜 개였다. 뒤집기나 앉기는 못했지만 먹을 걸 앞에 두고 손에 발을 턱 올려줄 줄 알았고, 배변 훈련도 어렵지 않았다. 까만 눈에 기쁨, 반가움, 슬픔 비슷한 감정들이 담겨 있는 걸 보았고 나의 감정도 그렇게 눈에 담아 주었다. 가만히 응시하면 가만히 바라봐주었다. 때론 부모님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말 못 하는 감정들도 있었다.


집 앞 하천 다리까지 자주 산책을 시켜줬고 잘 때는 내 침대 위 발 밑에 몸을 웅크리고 잤다.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먹을 것 앞에선 누구에게나 마음을 여는 그런 강아지였지만, 특별함을 아는 강아지이기도 했다. 소통이 가능해지니 신이 났다. 작은 생명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며 나는 마음속으로 작게 외쳤다. ‘밥만 주고 개껌이나 사준다고 사랑해주는 것 아니라고요. 먹을 것 앞에서 재롱부린다고 배 뒤집는다고 깔깔거리고 웃고, 꼬리 잡고 꼬리 물게 하는 장난치면서 깔깔거리며 웃으려면 장난감이나 갖고 놀아야지.’ 나는 여전히 입을 꼭 다문채, 강아지에게 애정을 쏟았다. 생명에겐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렇게 사랑해 주는 거라고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고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좋아했던 게 음악이랑 책이었다. 책은 시험 기간을 제외한 시간 동안 나의 자유를 확보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책 읽는다고 하면 내버려 뒀으니까. 집에 있는 문학 전집 고전은 온전히 내 것이었고 가질 수 없는 책들은 헌책방에서 빌려 봤다. 음악은 이어폰으로만, 유희열부터 드렁큰 타이거까지,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랙 데이비드에서부터 귀가 찢어질 듯한 락과 메탈을 들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가수는 열여덟 살의 김사랑이었다. 추억의 이름이다. 제2의 서태지라고도 했었지만 안타깝게도 2집까지 낸 후 빛을 보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노래도 좋아했지만 학교를 자퇴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모습이 나에게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음악 잡지만 사서 보다가 우연히 팬클럽 미팅 현장 녹음 테이프를 신청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팬클럽에 가입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얼마 후에 팬클럽 모임인지 작은 소규모 콘서트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가입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소규모 콘서트에는 정말이지 평생 한 번이라도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나 간절했던지 나는 간 크게도 홀로 서울에 있는 콘서트에 갈 계획을 세웠다. 그것도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거짓말을 하려면 좀 그럴듯하게 하던지 아니면 진짜 평생소원이라고 보내주면 1등 하겠다는 협상이라도 하던지, 머리에 피 안 마른 나는 고작 친구 생일 파티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빨간 광역 버스를 타고 홍대로 갈 계획을 세웠다. 말이 경기도민이지 실은 서울에 몇 번 가 본 적도 없는 촌뜨기였다. 그리고 촌뜨기의 거짓말은 보기 좋게 곧 들통이 났다. 기억의 단편은 이렇다. 엄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내가 갖고 있던 김사랑 시디를 종잇장처럼 손으로 구겼다. 기억 속 모든 음성은 자체 음소거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듣고만 있었다. 동생과 강아지는 저 쪽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강아지는 잠시 후 바닥에 발톱이 살칵살칵 닿는 소리를 내며 걸어와 내 좁은 무릎 위에 몸을 동그랗게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모든 소리가 멈췄다. 엄마로부터 잠깐의 적막과 망설임이 느껴졌다. 이번엔 음소거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떤 엄마가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도와 표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기나긴 말의 폭격은 견디기가 힘들며 말뿐이 아닌 폭격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견디기가 힘들다는 말은 조금은 견딜 수 있을 때나 하는 말이다. 정말 견딜 수 없을 때는 어떤 언어도 같다 붙일 수가 없다. 화가 났을 때 3초만 참으면 화를 참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모두에게 때론 잠깐의 적막과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그랬던 시간들 속에서, 넓은 거실 한가운데에서, 잠깐 모든 것을 멈추고 갈 곳을 잃은 두 무릎 너비만큼의 존재를 바라봐줬던 건, 그래야 한다고 알려줬던 건 그때만큼은 네가 유일했었다.


그 후로 나는 똑같은 시디를 또 샀지만 몇 번 듣지 않은 채 책장 한 구석에 고이 꽂아놓고 서서히 잊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서울 사람이 되어 갔다. 그렇게 내 머리에 피가 말라 가는 만큼 너의 갈색 털은 뿌연 회색 빛이 되어 갔다. 15년이 지나 너를 처남이라 불러주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신혼 땐 버릇대로 이를 갈다 잠에서 깨어 가끔 네가 보고 싶은 건지 어쩐지 몰라 울었다.


그리고 결혼 후 3년이 지나 첫째를 임신했다. 남편의 발령으로 중국에 살면서 임신 초기 입덧이 너무 심해 한국으로 들어왔을 때 알았다. 네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안락사였다. 가끔 한국에 올 때마다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게 눈에 띄게 느껴지긴 했었다. 엄마의 한탄도 자주 들려오곤 했었다. 눈동자는 뿌옇게 되어 까맣고 또랑또랑한 빛을 잃었고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힘이 하나도 없는 다리로 빙글빙글 제자리걸음만 했다. 엄마는 내가 칭칭이에게 각별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임신 중인 내가 너무 충격받을까 봐 차마 안락사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리무진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걸어가던 그 길에서 나는 배부른 몸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며 한참을 울었다.


그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은 가까운 죽음이었다. 그때까진 죽음은 그냥 죽음이었다. 죽음이란 존재의 영원한 부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한 생명의 죽음을 통과하며 새 생명의 탄생을 품에 안았다. 그즈음이었는지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로 인해 지금도 가끔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이라기보다는 부재를 떠올린다는 게 맞다. 존재의 부재가 어떤 것인지를, 존재를 존재하게 함은 또 어떤 것인지를 생각한다. 그렇게 현재 내 삶의 소중한 존재와 시간들에 한 걸음씩 다가가 본다.



나는 여전히 아주 가끔 너의 반들거리는 짙은 갈색 털과 반짝이는 까만 코를 떠올려.

목욕을 시킨 후 드라이를 할 때 나는 구수한 듯 퀴퀴한 냄새도 코 끝에 선해.

소소하고 촉촉한 기억들 그리고 존재함에 대한 깨달음.

그건 네가 내 인생에 남겨준 커다란 선물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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