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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Aug 16. 2021

샤인 머스캣

보라도 아니고 초록도 아닌 청포도. ‘청’으로 밖에 그 고급진 빛깔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그마치 고려청자가 아니던가. 그렇담 이 머스캣의 연둣빛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추측컨대 청에 대적할 수 있는 표현은 외래어뿐이었으리라. 그 이름도 영롱한 ‘샤인 머스캣’. 여름을 알리는 초록이 세상을 뒤덮기 직전 돋아난 새순에서 볼 수 있는 그 여린 연둣빛 같기도 하고 어릴 적 그 오즈의 마법사에 나왔던 에메랄드 빛 느낌과도 흡사하다. 둥글고 큼직한 포도알은 형광등을 반사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매끄러움을 자랑한다.


여기는 과일의 천국 중국. 넓은 땅덩이에서 골고루 난 과일들이 한자리에 모여있다. 동남아에 가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망고와 망고스틴을 여기에선 저렴한 가격에 종류별로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 망고라 하면 그저 손바닥 크기만 한 노란 망고가 망고인 줄 알았지 빨간빛이 도는 애플 망고, 하나도 안 익은 것 같은 청 망고는 여기에서 처음 봤다. 중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과일가게에 가면 딱 신선놀음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맛보고 싶고 저것도 맛보고 싶어 침이 꼴깍 넘어갔고 오늘은 이거 사서 먹어보고 다음엔 저거 사서 먹어보는 재미가 참말로 쏠쏠했다. 가격은 또 어찌나 저렴한지. 중국 생활 8년 차인 지금은 그냥 원래 먹던 과일 먹는다. 그 휘황찬란한 과일들 앞에서도 내가 골라 담는 건 여전히 사과, 복숭아다. 입맛이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변하기 힘든 것 중 하나인 모양이다.


이제 그놈이 그 놈인 과일 더미 사이에서 과일을 고르는 일은 나에게 평범한 일상이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배달도 잘 되어 있어서 시장 매대 앞에서 과일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골라 담는 재미도 덜하다. 그렇게 평범해진 ‘과일 골라 담기’의 일상이 최근 들어 조금 특별해진 건 바로 이 ‘샤인 머스캣 포도’ 덕이었다. 한국에서 단 한 번 맛보았던 그 포도. 아이들이 가는 키즈카페에 놓여 있어야 할 가짜 과일의 비주얼을 가진 그것. 이름도 생소하고 고급진 그 머스캣.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급 마트 과일 코너에서만 가끔씩 볼 수 있었던 머스캣 포도가 시장 곳곳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집 바로 옆 작은 마트에서도, 중국식 재래시장에서도 그 비주얼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망설이지 않고 머스캣 한 송이를 구입했다. 포도는 한 송이씩 투명한 비닐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고 가운데 일본어가 쓰인 띠가 가로 둘러 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가격을 떠올려 보면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내 입도 입이지만 두 아이들 입에 쏙 들어갈 커다란 포도알이 눈에 생생했다.


“얘들아~ 엄마가 뭐 사 왔나 봐라~”

“뭐야 뭐야?”

“이거 진짜 포도게 가짜 포도게~?”

“으응? (둘째의 가느다란 눈초리) 가짜지용~ (첫째의 동그란 눈) 아냐 아냐 이거 진짜 포도지롱~”


가짜 모형 과일을 앞에 두고 먹는 시늉만 했던, 셀 수 없이 빨고 촵촵거렸던 아이들은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가짜 같은 진짜 포도의 비주얼에 눈을 떼지 못했다. 껍질 까서 주려면 손에 즙이 뚝뚝 떨어지고 번거롭지만 그때만큼은 나도 신이 났다. 포도 까며 그리 신명이 날 줄은 몰랐지만, 그 포도의 맛이 신명 나는 분위기에 맹물을 끼얹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퉤퉤~ 에 맛없어.” 입이 짧은 첫째 아이가 포도 한 알을 삼키고 인상을 쓰며 입을 닫는다.

둘째는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엄마 나 이제 그만 먹을래.” 둘째가 다섯 입을 채우지 못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맛있는 건 귀신같이 아는 첫째 입에도, 뭐든지 잘 먹는 둘째 입에도 별로였던 것이다.

곧바로 나도 한 알을 따서 먹어봤는데 그 맛은 그야말로 밋밋함의 대명사였다. 포도는 포도이나 포도라 부를 수 없어 어딘가 슬픔을 머금은 듯한 맛.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암만 봐도 맛나게만 생겼는데, 맹 맛이라니. 머스캣이 맹 맛이라니.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집 근처 작은 마트에서 파는 과일이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가격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었다. 애들이 안 먹으면 어른이 먹으면 됐고 정 안되면 주스로 갈아 마시면 될 일이었다. 과일 하나에 실망을 하면 뭐 얼마나 하겠는가.


그리고 며칠 후 가족들과 함께 주말에 장을 보러 갔다. 이 도시 중심부에 있는 가장 고급스럽고 큰 쇼핑몰 지하에 있는 마트였다. 1층에는 명품 매장들이 즐비하고 지하에는 온갖 해외 식재료들이 구비되어 있는 그런 곳. 거기에서 나는 다시금 머스캣과 조우했다. 다양한 포장의 머스캣 포도들이 보석 같은 자태를 곳곳에서 뽐내고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저어 쪽 구석에서도. 주부의 본능으로 가격표를 먼저 확인했다. 비싼 것도 있었지만 마트에서 산 가격대와 같은 머스캣도 있었다. 갑자기 사무치는 듯한 후회가 몰려왔다. ‘아, 여기에서 샀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텐데. 이건 분명 맛있었을 텐데..’  

남편과 아이들은 카트를 끌고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는 머스캣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언젠가, 예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던 적이 있었다.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씹어봤더니 물 같은 게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어가서 자꾸 울컥울컥 했던 기억. 반지르르하게 눈앞에 놓여 있는 게 보석이라도 되는 양 생각 없이 덥석 집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는 따로 있었던 아린 경험.


내가 집어 들은 것들은 그랬다. 겉이 반지르르해야만 했다. 물러 터져 맹물같이 꾸룩꾸룩 삼켜야만 했던 내면을 들키지 말아야 했다. 물러 터져 가지고는. 그 한 마디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진짜들 속에서 들키지 않으려고 가짜를 자청했다. 내가 원했던 건 어딘가 가짜 티가 나는 가짜가 아닌 완벽한 가짜였다. 내 안의 내가 도무지 자신이 없어 백프로 내가 아닌 모습을 연기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들켜버릴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 역시 물러 터져 갖곤 진짜처럼 보이는 맹 맛의 머스캣이 되고야 말았다. 나는.


고급 마트 안 초록 알갱이들이 알알이 떨어져 나와 나에게 아우성 한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 중에는 고급의 알갱이들 사이에서 마음 졸이며 숨어 있을 여린 연두색의 너도 있을 것이었다.  한참을 서있다 장바구니에 아무것도 담지 않은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남편과 아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너희 모두는 포도의 여왕 샤인 머스캣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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