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공주 [호두 아이]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언덕 위 작은 농장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원은 봄의 생명들로 가득찼어요. 색색깔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동안 정원 한쪽 구석에는 전에 보지 못했던 초록 빛깔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잎으로 착각했던 그건 분명한 꽃이었어요. 안타깝게도 그 초록 꽃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 곧 시들어 버렸습니다. 꽃잎이 다 떨어지고 초록이 온 언덕을 다 뒤덮을 때까지도 말이에요. 꽃이 진 자리에는 작은 열매들이 봄의 경연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또다시 탐스러운 색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그중에는 여전히 초록빛을 띠는 작은 열매도 있었지요. 주인아주머니는 열매를 발견하고는 나무에 열심히 물을 주고 정성껏 키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열매를 발견한 아주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초록 열매 사이에는 또 하나의 동그랗고 단단한 갈색 열매가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웠던 건 그 안에서 껍질을 깨고 뛰쳐나온 엄지손가락만 한 작고 귀여운 사내아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무척 기뻤습니다.
“어머나 어쩜 이렇게 반짝이고 똘망할까! 내가 엄마란다. 오늘부터 너를 호두 아이라고 부를게. 호두”
아주머니는 아이가 나왔던 그 호두 껍데기로 호두 아이의 침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밤, 개미 한 마리가 창문 틈 사이로 들어왔습니다. 개미는 잠이 든 호두 아이를 발견하고는 동료 개미들을 몰고 왔습니다.
“이것 봐. 진짜라고 했잖아. 여왕개미님께 가져가면 아주 좋아하실 거야.”
개미 군단들은 호두 아이가 잠들어 있는 호두 침대를 개미집으로 데려간 다음 호두 아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입구를 흙으로 막아버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빛 하나 없는 깜깜한 땅 속에서 눈을 뜬 호두 아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여긴 우리 개미 군단의 기지야. 네가 쓸모가 있어 보여 데리고 왔지.”
“싫어요.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호두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었습니다.
일개미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사이에는 무서운 어둠을 이기려 슬픈 노래를 불렀지요.
“눈부신 햇빛, 간지러운 바람, 향기로운 꽃 내음.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네~.”
가까이에서 호두 아이의 노래를 들은 지렁이가 말했습니다. “
“가엾어라. 사실은 나도 눈이 어둡고 팔다리도 없지만 네 목소리의 아름다운 진동은 느낄 수 있어. 힘내라고 작은 친구!”
지렁이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호두 아이를 다시 찾아왔어요. “난 비가 오는 날엔 땅 밖으로 나갈 수 있어. 내 꼬리를 단단히 잡아.”
호두 아이는 지렁이의 도움으로 드디어 개미 소굴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지렁이야, 정말 고마워.”
하지만 비가 그치자 지렁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야 했고 호두 아이는 허허벌판 흙더미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을 헤매던 때 제비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호두 아이는 용기 내어 말했습니다.
“제비야 나 길을 잃었어. 좀 도와줄 수 있니?”
그러자 제비는 호두 아이를 등에 태우고 숲으로 날아가 호두 아이를 내려주었습니다. 호두 아이는 그곳에서 나뭇잎을 쌓아 잠잘 곳을 만들었고 배가 고프면 꽃의 꿀이나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낙엽이 지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습니다. 호두 아이는 펑펑 내리는 눈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따뜻하게 지낼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겨울잠을 자기 시작한 동물들의 집은 전에 없이 고요할 뿐이었지요. “똑똑.” 얼어버릴 것만 같은 손발을 녹여 마지막으로 두드린 문은 바로 들쥐네 집이었습니다. 들쥐 아저씨는 호두 아이에게 따뜻한 음식과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어요.
“아이고 딱해라, 여기서 함께 겨울을 나자꾸나.”
호두 아이는 들쥐 아저씨의 일을 도우며 지냈어요. 호두 아이의 맑고 영롱한 목소리에는 특별한 생명력이 담겨 있어서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한 번 들으면 누구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시들어가는 화분은 초록빛을 되찾았습니다. 덕분에 들쥐 아저씨는 겨우내 힘을 내서 일을 하여 멋진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소식을 들은 이웃집 두더지 아주머니가 찾아왔습니다.
“호두야, 나에게도 노래를 들려주지 않겠니?”
호두 아이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
“네 목소리를 들으면 정말 신기하게도 힘이 나는구나.”
두더지 아주머니는 그 후 땅굴을 파는 일꾼 두더지들을 줄줄이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아주머니의 집은 호두 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만큼 커져갔지요.
“네가 매일 노래를 불러준다면 너와 들쥐 아저씨를 이 으리으리한 새 집에서 살게 해 주마.”
하지만 호두 아이는 더 이상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이제 노래 부르는 게 싫어졌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들쥐 아저씨가 나섰어요.
“네 노랫소리를 듣고 두더지 아주머니가 우리를 찾아오게 된 건 행운이야. 여태껏 널 먹이고 돌봐줬는데 넌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노래 한 곡 부르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호두 아이는 몇 번이고 닳도록 불러 입에 밴 노래를 부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날 밤, 호두 아이는 밤늦도록 잠이 들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 앞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제비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어요. 추워지기 전에 미처 남쪽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 제비였지요. 눈에 젖은 차가운 제비의 몸을 쓰다듬어보니 제비의 심장이 희미하게 팔딱이는 게 느껴졌어요.
“아직 살아 있었어!”
호두 아이는 안전한 곳에 제비를 숨겨주고 매일 물과 먹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며칠 후 눈을 뜨게 된 제비가 말했습니다.
“친구에게 네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작은 호두 아이.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다시 날 수 있게 되었어.”
“아, 나를 도와줬던 그 제비의 친구였구나. 만나서 정말 반가워. 어서 네가 훨훨 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추운 겨울이니 봄이 올 때까지 여기서 함께 기다리자.”
호두 아이의 노래에 담긴 힘 덕분에 꽃들이 활짝 피어날 때쯤 제비는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호두야. 나와 함께 남쪽 나라로 가자.” 제비가 말했지만 호두 아이는 망설였습니다.
“아니야. 나는 너와 함께 갈 수 없어. 내가 가면 들쥐 아저씨가 슬퍼하실 거야.”
제비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외쳤습니다.
“호두야. 너의 멋진 목소리로 그 누구도 아닌 너를 위한 노래를 불러봐. 이 봄의 마지막 꽃잎이 떨어지는 날, 이곳에서 널 기다릴게.”
호두 아이는 제비가 남기고 간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꽃잎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그렇게 싫어하던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은 어쩐지 더 간절해졌습니다. 매일 제비가 날아간 텅 빈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하얀 구름 아래 초록빛 나무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제야 호두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습니다.
마지막 꽃잎이 툭 떨어지던 날, 호두 아이는 들쥐 아저씨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꼭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두더지 아주머니네 집보다 아저씨가 만든 이 작은 집이 훨씬 더 근사해요.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게요.”
들쥐 아저씨는 호두 아이의 단단해진 등을 감싸 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비야 이제 나와 함께 남쪽 나라로 가자!”
“그래 호두야, 너와 함께 갈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고 설레. 남쪽 나라로 출발!”
제비는 호두 아이를 등에 태우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 머나먼 남쪽 나라로 향했습니다. 남쪽 나라에서는 제비의 가족과 친구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지요. 모두 호두의 노래를 듣고 감탄한 것은 물론입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음으로 멋을 부리는 제비도 있었고 중저음의 바리톤을 뽐내는 제비도 있었지요.
“우리 제비 합창단에 들어오지 않을래? 네 목소리는 정말 특별해.”
이제 호두는 더 이상 작기만 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호두 껍질만큼이나 단단한 마음을 가진 소년으로 성장해 있었지요. 호두는 제비 합창단과 함께 남쪽나라, 서쪽 나라를 오가며 그 어느 때 보다도 행복한 노래를 불렀답니다.
엄지 공주 이야기는 언뜻 생각하면 진부한 듯합니다. 누군가의 도움만 받다가 왕자님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옛날 옛적 동화 이야기에 그칩니다. 하지만 처음 작품이 발표되었을 그 시기에는 달랐을 것 같습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 고난과 역경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삶, 가문끼리 맺어지는 결혼의 의미. [엄지공주]는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 삶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을까요. 햇빛과 꽃을 사랑하는 엄지공주가 어두운 땅 속에 사는 두더지 가문과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이야기는 과거 역사 속에 분명 존재했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 이 동화에 담긴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이 시대에 맞게 해석해보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동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등장인물들은 원작의 캐릭터들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지만 엄지공주를 납치한 두꺼비는 개미로, 도움을 주는 물고기는 지렁이로 바꾸었습니다. 못생긴 두꺼비가 나쁜 놈이 되고 귀여운 물고기가 도움을 준다는 건 외모에 대한 편견일 것입니다. 부지런함의 대명사인 일개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자비함을 가지고 있는 반면, 지렁이는 징그러운 외모에 눈도 어둡고 팔다리도 없지만 아름다운 음악에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을 지녔습니다. 또한 들쥐 아저씨를 통해 변화하는 캐릭터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아저씨가 두더지 아주머니의 커다란 집에 눈이 멀었던 것처럼 삶에서 우리는 잠시 무언가에 눈이 멀기도 하지만 상대방의 진실한 마음을 마주했을 때 다시금 눈물을 쏟기도 하지요.
고난과 역경도 도전하고 나아가면 모험이 됩니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밋밋한 초록 꽃에서도 호두 열매는 단단한 결실을 맺습니다. 사회가 바라는 기준에 맞춰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것을 잃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며 성장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