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기전에 선생님이었던 나
적어도 영어만은 잘하게 해주고 싶었다.
학교 다닐 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과목은 국어와 수학이었고 가장 싫어하던 과목은 영어였다. 영어시간을 떠올려보면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단어깜지를 쓰고 매일 단어를 외우고 시험 보고 잊어버렸던 기억밖에 없었다. 단어집을 사서 자꾸 외우고 까먹기를 반복하느라 하도 앞에서 부터 다시 봐서 앞부분만 외우다 끝난 기억들. 그때까지 영어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과목이었을 뿐이었다.
다르게 살고 싶어서 시도한 많은 일들 중에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영어를 공부한 것이었다. 스물 후반이 되어 영어에 눈을 뜨고 고생 고생해서 배운 나였다. 새벽 학원을 다니고 공부하듯 책을 짊어지고 도서관에 들어가 주말을 반납하고 살았을 때도 나에게 영어는 지루하고 힘든, 나에겐 맞지 않는 과목이었다. 하지만 영어를 듣고 말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는 완벽하게 달라졌다. 영어는 과목이나 공부의 대상이기전에 언어라는 것, 그래서 영어로 듣고 말하는 즐거움을 깨달으면 국어 공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물 일곱 영어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영어를 좋아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영어를 좋아하고 영어로 업을 삼아 오래도록 공부하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영어는 완벽하게 넘지 못하는 높디높은 담과도 같았다. 아무리 시도해도 넘기엔 까마득한, 시도 때도 없이 담타기 훈련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함과 답답함, 그리고 막막함이 늘 마음속에 존재한다. 듣는 귀는 있어서 잘하고 싶은데 원어민처럼 말하고 쓸 수 없어 늘 아쉽고, 좌절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더 간절했다. 나와 달리 어릴 때부터 영어를 좋아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듣고 말할 줄 알아도 절대 건널 수 없는 그 사이의 무엇, 아이는 어렸을 때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듣고 말하며 내 삶은 훨씬 더 풍요로워졌으므로. 거기에 내가 극복하지 못한 부분까지 아이는
극복해 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영어를 좋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공부로 접하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말하듯이 배우는 시간이 되도록 할 자신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영어 책 읽기, 아이는 제법 영어를 좋아했다.
한글책 영어책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어줬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책 육아, 좋게 말해서는 책 육아지만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매일 매 순간 안아달라고 우는 아이를 내려놓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었다. 다섯 살이 되고 아이는 친구 이름을 칠판에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글을 뗐다. ’ 그래 바로 이게 책의 힘이지 ‘ 마음에 확신을 갖게 된 나는 더더욱 책 읽기에 힘을 쏟았다.
하루에 100권은 기본 북트리 쌓는 즐거움이 마치 내가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라도 되는 양 열심을 다해 책을 읽어줬다. 노래를 틀고 같이 따라 부르기도 하고, 아이들 수업한다고 만들어 둔 단어카드들을 집안 곳곳에 붙여 떼어오기 게임을 하며 아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일상에서 읽고 놀이하며 영어와 친해지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영어로 영화도 보고 영어 그림책을 읽으며 그렇게 차곡차곡 즐거움을 쌓아나갔다.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마음은 ‘책 읽기 = 영어 = 신나는 놀이’였고, 성공한 듯싶었다.
그렇게 아이는 여섯 살이 되었다. 말하기로는 반에서 따라올 친구가 없었고, 영어에서도 I can do it. What do you want? 같은 가장 기초가 되는 문장 만들기에 성공했다. 아이는 읽고 쓰는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단어카드로 만든 문장을 쓰고 읽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좋아하는 그림책을 통째로 외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으며 퇴근하고 온 엄마와 책 읽고 활동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다.
이대로만 계속 지속된다면, 나도 엄마표로 성공하는 걸까?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함께 책을 읽고 즐기는 모습이 아이에게는 놀이시간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감도 잠시 모든 것이 멈췄다. 마치 그 시간이 먼지처럼 싹 사라지기라도 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