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함을 유지하라
무더운 여름이 오고도 여전히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는 열감은 나를 좌절하게 했다가 또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고 정신없이 지내느라 몸과 마음에 정성을 쏟는 일을 또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돼묻는다.
적당함을 지키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의 모든 영역에서는 적당 함이라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순간이 많다. 아무리 적당하게 하고 싶어도, 그 간격을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 잘하고 싶을수록 열심히 할수록 자연스럽게 그 적당함과 멀어진다.
매일 치열하게 책을 읽고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남긴다. 아이들과 수업하는 샘인 나의 본캐를 잘 키워나가기 위해 삶의 우선순위에 둔 독서, 사실 그 독서만 잘하고 살기에도 버거운 날들이 있다. 수업도서 읽기에도 바쁜데 왜 이렇게 읽고 싶은 책, 읽어야 할 책들이 가득할까? 틈틈이 10분 30분씩 쪼개서 읽는 도서만도 대체 몇 권인지,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다음 시간들은 틈틈이 강의안을 기획해서 짜고 출강을 다녀온다. 너무도 감사하게 가득가득 들어차고 있는 출강 소식은 감사하기도 하고 조금 버겁기도 하다. 온 에너지를 쏟아서 강의안을 만들고 (한 번도 같은 강의안을 쓴 적이 없는 나의 삶) 강의를 준비하다 보면 삶이 소진되는 기분이지만 강의하고 나서 밀려오는 뿌듯함은 또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특히 부모교육과 청소년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거절할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난 그 사이사이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숙제를 한다. 죽어가는 블로그에 숨을 불어넣어야 하고, 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나의 생각들을 붙잡아 브런치에 남긴다. 격주로 하고 있는 공부엔 겨우 겨우 숙제를 내는 꼴이라니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그렇게라도 배우고 익히며 나를 극복하고 싶은 이 욕구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 공방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기록하고 사업가로서의 나를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기도 하다. 새로 만난 좋은 인연들과 또 다른 아이디어로 일을 벌이고 키우고 채워나간다. 공방을 운영하면서 달라진 가장 큰 이득은 내가 알지 못하던 세계로의 문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전엔 만날 일도 없고 그럴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나누고 성장해 간다. 내가 꿈이라고 말하며 내뱉었던 단어들이 실현이라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고, 후회를 한 순간도 있지만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두 원래부터 그렇게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 사이사이 아이에게 마음을 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금세 티가 난다. 아이 건강을 신경 쓰며 밥을 하고, 체중이 심각하게 늘어난 남편을 위해 아침 주스를 갈고 남편 감기약을 챙기며 식사준비하며 빨래 돌리고 청소기를 돌린다. 한가득 쌓인 쓰레기를 들고나가서 30분 틈새 걷기를 하고 그 사이사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오는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며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쓴다.
그러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 터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야 가능한 나의 하루 일과 사이클에 쳐들어온 큰 사건, 냉장고가 멈춰버린 것이다.
아침을 잘 챙겨 먹고 다시 열었더니 불이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한 여름에 멈춰버린 냉장고라니 마치 조심하라는 경고처럼 섬뜩했다. 적당함을 모르고 너무 혹사시켰다간 큰일 난다고 정신 차리라고 알려주는 경고등이 켜진 것처럼 두려웠다. 매일 가득가득 채워 넣고 문을 열고 닫고 하기를 13년 오래도 썼다. 그래, 너 잘도 버텼다.
고장 난 냉장고를 비우느라 한나절을 썼다. 칸칸이 넣어 정리한 냉동실 아이템들을 다 버려야 하는가.
끙끙거리며 버리고 비우고 남겨둘 것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4-5시간 만에 다시 불이 들어온 냉장고 덕분에 4일 동안 다행히도 천천히 냉장고를 비울 수 있었다. 잠깐만 실온에 거 내두면 땀을 뻘벌 흘리는 냉장고 속 아이템들을 새 냉장고로 이사시키느라 진땀을 뺀 날도 출강이 있었다. 새 냉장고를 사고 그 속을 깨끗이 닦지도 못하고 일단 냉장고를 채워버렸다. 주말엔 다 꺼내어 닦고 새 냉장고를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냉장고 문은 열어보지도 못한 채 어느새 일요일 밤이 되었다.
지난 일주일 나에게 빨간불 경고등을 들고 일상을 침범한 냉장고 덕분에 남아있던 체력을 다 소진해 버린 것 같다. 문제는 오늘밤에도 해야 하는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이다.
하루종일 배 깔고 누워 책 읽으며 뒹굴 거리고 싶다. 아이랑 에어컨 약하게 켜고 다리를 비벼가며 과자 봉지를 뜯고 책 속에 나온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웃다가 맛있는 점심을 시켜 먹고 영화 한 편을 보고 싶다. 마치 아무 일도 안 해도 되는 마음 편한 날이 계속 이어질 것처럼.
이번 여름방학에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런 보통의 일상을 즐기는 날을 3일쯤은 보내야겠다. 앞뒤로 빡빡하게 조절해야 가능할지 몰라도, 다 소진되어 불이 꺼져버리면 진짜 난감하니까 아직 깜박이는 에너지가 남아있을 때 고속충전하기로!
갑자기 찾아온 냉장고 네 경고등 덕분에, 나의 삶에도 쉼표를 찍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