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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리썸머 Jan 06. 2024

운동화를 빨았다.

건강검진이 주고 간 기회

월요일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겨울비는 우리 집 현관에 흔적들을 남겼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는 운동화를 벗어두고 크록스로 바꿔 신고 학원에 갔다.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 지저분한 운동화를 보더니 다른 운동화로 또 바꿔 신고 나갔다. 아이는 그날도 돌아와서 크록스로 바꿔 신고 학원에 다녀왔다.


그리고 오늘, 수요일 아침 등굣길에 3초 망설이던 아이는 월요일에 벗어두었던 흙탕물이 잔뜩 낀 운동화를 다시 꺼내 들고 발을 집어넣었다.

“그걸 다시 신고 가면 어떡해, 이거 신고가. “

나는 얼른 신발장에서 내 검은 운동화를 꺼내주고 더러워진 아이의 운동화 두 켤레를 화장실에 가져다 두었다.

‘오늘은 빨아야지. 오늘은.’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을 못쓰고 살았나, 정신없이 살고 있는 나의 일상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여유 있게 일할 때는 적당한 주기로 운동화를 빨아주고, 가끔 놓치면 세탁소에 맡겨 찾아오곤 했는데 아이의 운동화가 다 젖고 흙탕물이 튀어서도 빨아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 왜 난 내 잘못처럼 불편하기만 할까?


코로나로 몸과 마음이 묶였던 때에 얼굴에 찾아왔던 무섭도록 두려웠던 질병 때문에 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힘들어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일로 인해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내가 중요시하던, 알고 보면 조금 내려놓을 수도 있었던 집안 일과 움켜쥐고 있던 많은 것들로부터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시작된 나를 위한 일상은 행복으로 채워졌다.


고전을 읽으며 마음공부를 했고, 매일 그림일기를 쓰며 하루하루의 나를 응원하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결이 맞는 좋은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도움도 많이 받고 응원도 받으며 조금씩 나를 위한 세상을 키워갔다. 이젠 더 이상 육아가 힘들지도 집안일이 버겁지도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더 즐겁게 열심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나를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좋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하고 우울하던 내 일상에 빛처럼 찾아든 소식이 나를 설레게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경험한 것들로 작은 길을 만들어 주는 것 같은 강의, 바쁘지만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난 내가 아팠다는 사실조차 잊어갔다.


틈틈이 건강을 위해 늘 신경 썼고, 걸으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행복했다. 한쪽 귀퉁이에서 가끔 날 오그라들게 하는 작은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반복적이고 무기력했던 과거의 내 일상보다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해내는 지금의 내가 더없이 좋았다. 내가 느끼는 마음과 몸이 느끼는 상황의 온도가 서로 많이 달랐을 뿐.


‘그런 내가 어리석다 생각이 되었던 걸까?’


더 늦기 전에 건강검진을 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이것부터 해야지 해야지 마음의 소리를 키워 내시경도 하고, 위암 유방암 자궁암 검사를 했다. 검사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나자 하나씩 차례대로 문자가 들어왔다.


대략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유방암 검사 결과 비대칭 소견이 보입니다.

여성병원에 초음파 보시면 좋겠어요.‘

’ 자궁에 세균 바이러스 보이네요.

여성병원에 추가 검사 해보세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꼼꼼하게 검사해 보자는 의견은 예전에도 몇 차례 받은 적이 있어서 전에 자주 가던 여성병원에 예약을 하고 차례차례 검진을 다녀왔다. 자궁 바이러스 검사로 한 번 약을 먹었고, 유방 초음파를 갔다가 난생처음 조직검사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히 갔다가 긴 바늘로 조직검사를 한다고 하니 너무 겁을 먹었나 덜컥 무섭기도 했다. ‘그동안 만져지는 느낌 못 받으셨어요?’ ‘아프지도 않았고요?’  조금 당황한 눈치의 의사가 제차 ”드시는 약 없고요? 이번이 처음이시죠?”라는 물음을 여러 번 반복하니 ’나름 큰 병원인데 경력이 없으신가? 조직검사 하시는데 왜 긴장하신 것 같지?‘ 몰래 혼자 생각할 정도였다.


가슴에 퍼런 멍이 들었다. 검사 당일에는 거대하게 붙여진 거즈를 보며 순간 마음이 덜컥했지만 하루 푹 자고 나니 마음도 괜찮아졌다. 그렇게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 동안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던 나는 또 평소처럼 바쁘게 수업을 하고 워크숍에 가서 내년 계획을 세우고 한 달 비워둘 공방을 공간대여로 올리고 새로 들어온 예약을 체크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월요일 병원에서 예약 안내 문자가 왔다. 결과 안내를 위해 의사와의 만남을 예약하고 온 터였다. ‘조직검사를 하면 결과를 의사 만나서 듣는구나 ‘ 별일 없이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왔나요?’

병원에서 마주한 의사의 표정에 이런 질문이 그려있었다.

손을 만지작만지작하던 의사 선생님은 조용히 말했다.


말씀드리기 안타깝지만 유방암이에요. 1기는 지난 것 같고 제가 보기에는 아마 수술과 항암을 모두 피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사실 먼저 건너온 자료를 보고 이상 소견이 쓰여 있었고 초음파를 보니 아무래도 그래 보였거든요. 안타깝게도 결과가 이렇게 나왔네요. 너무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일 먼저 빠른 예약을 하셔야 해요. 지금 나가서 바로 환자분께서 다니시기 편안한 곳으로 몇 군데 예약을 해서 초진을 잡으세요. 꼭이요.


그 정신에도 또렷하게 들리던 단어를 되짚어보며 방을 나왔다. 올게 왔다고 생각한 걸까?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한 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너 아프대.’

‘유방암이라잖아’

귀로는 들었고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마음엔 아직 전달이 되지 않았나 보다.


몸은 이렇게도 정확한데 한 치 앞도 모르고 다른 고민들을 하며 살았다. 나 스스로 내 몸을 나 몰라라 했다고 나를 미워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까지 내 탓으로 돌리기엔 나 자신이 너무 가여우니까.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친구가 알려준 대로 병원에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았다. 서울 유명 병원들은 4월이나 되어야 초진을 볼 수 있다고 하고, 극적으로 취소분이 생겨 일주일 후 병원 검진을 갈 수 있게 된 나는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가서 아침에 준비해 두었던 아이의 운동화를 빨았다.



새삼 운동화를 빨아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했다. 수술과 항암을 시작하면 무거운 것은 들지도 못하고 일상의 많은 일들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해서 힘들어했다던 친구들의 말을 떠올리며 아이에게 그동안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의 밥을 챙기고 침대를 정리하고 빨래를 해주고 간식을 챙기고 태워다 주고 저녁을 차리고 운동화를 빨아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잠깐 잊고 살았던 나에게 찾아온 기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건강한 오늘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는 거품이 나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열심히 운동화를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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