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열상 봉합기
코로나로 비행기를 못탄지가 2년이 넘어가고, 세 돌을 훌쩍 넘긴 아이는 이제 보여주는 것 설명해 주는 것들을 꼭꼭 씹어 소화할 수 있는 어린이가 되어가고 있다. 때마침 친하게 지내던 아이 친구네가 제주도 여행을 제안하여 무려 4개월 전부터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를 예약하며 제주도 여름 휴가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영장과 키즈룸이 있고, 자동차 5분 거리에 해변을 갈 수 있으면서 두 집이 머물 수 있는 독채 펜션'이라는 까다로운 조건에 극성수기에 자리가 남아있는 숙소를 찾기 위해 아이 친구 엄마와 몇 날 밤을 끙끙대며 고른 숙소였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 4일 휴가를 내야 하는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그보다 아이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간다는 설레임이 훨씬 커 그 정도 마음의 짐은 훌훌 날려버렸다. '저 다음주에 제주도가요' 라는 자랑이 계속 입밖으로 나왔다. '준아 우리 내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큰 택시 타고 비행기 타러 가야해. 그러니까 우리 일찍 자자~' 라며 별로 졸려하지 않는 아이를 억지로 눕혔다. 원래 낮잠을 자지 않는 아이인데 하필이면 그 날 어린이 집에서 낮잠을 자고 왔던 것이다.
어린 시절 소풍가기 전날같은 설렘때문이였을까 나도 남편도 푹 잠이 들지 못했다. 결국 남편은 새벽녁에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고, 뒤척이며 잠들던 나는 '쿵' 소리와 함께 아이의 칭얼거림에 벌떡 일어났다. 직감으로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진걸 알았고, 이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였기에 '하필 여행 전날 떨어졌네 푹 자야하는데' 라고 생각하며 어둠속에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런데 아이가 축축한게 아닌가. 자다가 쉬를 쌌나? 근데 왜 팬티는 안젖었지? 졸음때문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남편을 큰 소리로 불렀다. '오빠 준이 침대에서 떨어졌어!' 그리고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가 불을 켰는데...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얼굴이 피투성이가된 아이는 졸음에 취해 칭얼거리고 있었고, 머리카락과 속옷에서 피가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피가나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이마의 뚜렷한 1자 모양의 패임. 얼마나 깊고 컸는지 안에서는 피가 송송 솟아 나고 있었고, 내가 보고 있는 이 심한 상처가 우리 아이 이마에 난 것이 맞는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큰일났다' 남편은 이미 난리가 났다. 한 템포도 쉬지 않고 '아이고 준아 준아 어떻게 어떡하지' 정신이 반쯤 나간거 같았다. 나는 아이의 이마를 수건으로 지혈하며 119를 불렀다. 그 정신에 입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핸드폰 충전기를 가방에 챙겼다.
새벽 2시 20분. 그렇게 우리 세 가족은 엠뷸런스를 타고 강남 모처에 있는 성형외과 당직의가 있는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의 상처를 확인하는 구급대원을 통해 처음으로 아이 상처를 제대로 쳐다봤다. 너무 끔찍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내가 할수 있는건 아이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해주고, 응급실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미리 설명해 주는 것 뿐. 응급실로 가는 한시간동안 한시도 쉬지 않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마 한가운데 세로로 난 5cm 가량의 깊은 열상. 분명히 봉합을 해야 할텐데 아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수면마취를 해야할까.
'준아, 지금 준이 이마가 찢어져서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해주실거야. 그건 좀 무섭고 아플거야. 엄마라도 무섭고 아플거 같아. 그런데, 엄마가 준이 손을 계속 잡고 있을거고, 엄마가 100까지 세면 끝날거야. 약속할게. 100까지만 세면 끝나는거야. 엄마랑 같이 할수 있을까?' 최대한 아이에게 이해시키려고 열과 성을 다해 이야기 했다.
당직선생님이 오시고, 아이는 침대에 누웠다. 나는 수건으로 아이 눈과 귀를 꼭 막은 채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를 잡고 있었기에 의사가 아이의 벌어진 이마 속으로 마취바늘을 사정없이 꽂아 넣는 걸, 연한 이마 피부에 갈고리 모양의 바늘을 꿰는 것을 바로 눈 앞에서 보았다. 머리를 돌릴까도 생각했지만, 아이가 아픈데, 내 마음이 힘들다고 피하는건 너무 미안했다. 아이의 빨간 속살과 오고가는 바늘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려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어머니 아직 더 걸릴텐데요' 내가 80까지 세자 당직의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몇번 더 셀거에요. 조급해 마시고 천천히 이쁘게 꼬매주세요.' 100까지 세고도 영어로도 한번 세고, 한글로도 또 한번. 그렇게 100을 세 번 세고 나서야 아이의 봉합이 마무리 되었다. 아이의 이마가 닫히자 그제서야 부여잡힌 심장이 스륵 풀어지는 듯했다.
두 눈을 꼬옥 감고 22바늘을 견뎌낸 준이는 완전히 제 컨디션으로 돌아와 병원 이곳저곳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게 아이들의 회복력인가... 내 멘탈은 너덜너덜해 졌는데...
공항갈 때 부르려던 벤 택시를 병원 앞으로 불렀다. 어슴푸레 다가온 새벽, 반포의 큰 도로가에 우리 세 가족은 서있었다. 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차분하고 담담했다. '우리 준이 흉 안남도록 진짜 열심히 치료하자. 최고로 잘 치료해주자' 남편과 다짐했다.
그렇게 우리의 제주도 여행은 허망하게 날아갔다. 대신 안방 바닥 한켠에 푹신한 매트리스를 깔아 사방을 베게로 둘러싸고 우리가족만의 제주도를 만들었다. 낮에는 그 안에서 장난감을 가져와 놀고, 밤에는 렌턴을 켜고 이야기를 나누며 옹기종기 잠이 들었다. 박물관 대신 침대 쇼핑을 다니고, 요트 투어 대신 아쿠아리움을 갔다. 일주일 동안 엄마 아빠의 지극 정성 케어를 받은 아들은 더욱 밝아졌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 이마를 가리키며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쳤어요!' 라며 의기양양해했다.
가드도 있는, 40cm 높이밖에 안되는 침대에 떨어져 어떻게 저렇게까지 다쳤는지 남편과 나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한동안 침대에 누울때면 아들이 자기 침대에서 우리 침대로 굴러와 떨어지는 모습이 계속 머리에 그려졌다. '내가 그날 억지로 재워 더 움직였던 걸까, 내가 다리로 막고 있었으면 아이가 발치로 굴러오는걸 자다가 알지 않았을까, 바닥에 깔아놨던 매트를 치우지 않았더라면 이만큼 다치지는 않았을텐데' 수많은 후회가 밀려왔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사고가 있은지 이제 3주차. 아이의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갔다. 크게 아프면 아이가 변한다더니 준이도 훌쩍 자란 것 같다 (크게 아프면 부모의 완벽한 관심을 받아 아이가 한뼘 성장하는게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물론 이런 사고가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일이 생김으로서 얻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에게는 아이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던 계기였고, 가족이 똘똘 뭉쳐 어려움을 헤쳐나간 경험은 나중에도 두고두고 힘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우리 아이 상처 남지 않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