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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Nov 29. 2019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노동자들이 사랑한 장어 젤리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는지라 가끔 미디어에 본의 아니게 '미식 칼럼니스트'로 소개되기도 한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맛있는 음식을 쫒아 얼마나 맛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작 음식의 맛에는 관대한 편이다.


 맛의 있고 없음은 접시 위에만 있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부터 감각적인 맛 그 자체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음식에 마음을 주게 됐다. 산해진미보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은 음식, 그리고 곧 사라질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음식을 사랑한다. 이번 런던 취재 길에서 만난 장어 젤리가 그런 음식이다. 



장어 젤리라고 해서 장어 맛이 나는 달달한 젤리를 상상해선 곤란하다. 조리법은 간단하다. 토막 낸 장어를 물에 향신료를 넣어 삶은 후 그대로 식힌다. 장어에 함유된 젤라틴 성분으로 인해 식으면 육수가 젤리처럼 굳는다. 오래 끓인 사골 곰탕이나 삼계탕을 냉장고에 넣어두면 벌어지는 현상과 같은 원리다. 단지 우리는 다시 데워 따뜻한 국물째 먹지만 장어 젤리는 차가운 채로 먹는다는 게 다를 뿐이다. 동네와 취향에 따라서 장어 젤리를 따뜻하게 데워먹기도 한다.



장어 젤리는 생선 튀김인 피쉬앤칩스, 간 고기를 넣어 만든 민스파이와 함께 대표적인 '코크니' 푸드로 통한다. 코크니란 런던에 거주하는 노동자 계층을 낮춰 부르는 말이다. 지역을 막론하고 노동자의 음식으로 살아남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먼저 값이 저렴해야 하고 열량이 높아야 한다. 또 빠르게 많이 만들어져야 하기에 조리법이 복잡하지 않아야 하고, 거리에 서서도 먹을 수 있는 단품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이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어 젤리의 탄생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다. 강에서 손쉽게 잡히는 민물장어는 내륙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식재료였다. 장어는 소금에 절이거나 식초에 절인 다른 생선과는 달리 훨씬 신선한 상태로 먹을 수 있었다. 이는 질긴 장어의 생명력과도 연관이 있다. 물에서 건져 올려도 쉬이 죽지 않아 운송과 보관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장어가 보양식이라고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담백한 살코기 맛에 매료되어 중세 왕과 귀족, 그리고 수도원의 식탁에 자주 올랐다. 



중세의 유럽 세계는 음식의 성질로 건강을 다스릴 수 있다는 이른바 4 체액론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모든 음식은 4가지 성질, 뜨겁고 차가운 것, 습하고 건조한 것으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 몸 또한 이 네 가지 성질이 조화를 잘 이뤄야 건강한 상태라고 여긴 것이다. 장어를 비롯한 생선은 차갑고 습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조리법이나 함께 먹어야 할 음식의 성질은 반대되는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불에 굽는 방식과 튀기는 방식은 뜨겁고 건조해 생선요리에 적합한 조리법이었다. 


13세기 신학자이자 의사, 과학자였던 알렌산더 네켐은 생선은 뜨겁고 건조한 성질의 와인과 물에 삶아 녹색의 허브 소스에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장어 젤리와 함께 세트로 나오는 민스파이와 매쉬포테이토에 녹색의 파슬리 소스를 끼얹어 먹는 방식의 연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과 바다에 넘쳐났던 장어는 대구와 함께 18세기 중반 당시 도시의 굶주린 노동자들의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량자원이었다. 처음에는 장어 파이의 형태로 길거리 노점에서 판매됐다. 식은 장어 파이의 속은 젤라틴이 굳어 젤리처럼 되어었었다. 먹는 입장에서는 한 손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고 내용물이 흘러내리지 않아 인기가 높았다. 


템즈강이 오염되고 장어 개체수가 급감하자 장어의 가격은 점점 높아졌다. 2차 대전 후 장어 공급이 줄자 장어 파이는 다진 쇠고기를 넣은 민스파이로 바뀌었고 장어는 젤리의 형태로 따로 판매됐지만 한동안 여전히 노동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인기 있는 음식으로 통했다.



2000년대 들어 영국산 장어는 씨가 마르다시피 했고, 유통되는 거의 대부분의 장어는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수입산 장어 가격이 점진적으로 오른 건 다른 문제에 비하면 그나마 사소한 편이었다. 다른 패스트푸드 경쟁자들의 등장, 새로운 세대들의 외면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따른 주 소비층의 감소, 배달음식의 유행 등이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한때 민 스파이와 매쉬, 그리고 장어 젤리는 파는 식당은 런던에서만 100여 개가 넘었지만 지금은 열 곳이 채 안 될 정도로 그 수가 줄었다. 150년 넘는 전통이 곧 사라질 위기에 닥친 셈이다. 




장어 젤리의 맛은 어떨까. 영국의 기괴한 음식으로 종종 소개되긴 하지만 맛은 그리 기괴하지 않다. 조리법이 단순해 장어 본래의 맛과 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예상과는 달리 비린내는 거의 느껴지지 않고 여기에 전통적으로 매운 고추를 식초에 절인 소스를 뿌려 먹으면 훨씬 맛이 다채로워진다. 


젤리처럼 굳은 육수는 비록 질감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곰곰이 음미해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장어 지리탕의 맛이 났다. 맛이 정말 좋다는 말은 쉬이 나오지 않지만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맛 같은 건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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