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우 Mar 14. 2017

벨기에는 왜 초콜릿 강국이 되었을까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단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달콤한 맛을 마냥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단 음식을 먹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죄책감 같은 것이 느껴지는 탓이다.


특별히 미각에 이상이 없는 한 인간이라면 단 맛에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 몸에 없는 탄수화물, 즉 당류를 섭취하려는 것이 본능이기에  필연적으로 단 맛을 갈구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미각적 쾌감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사탕이라던지 설탕이 잔뜩 들어간 디저트를 먹을 땐 괜히 내 몸에 죄를 짓는 것만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음을 느낀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초콜릿은 어떻게 해도 거부할 수가 없다. 사탕처럼 1차원적인 단 맛이 아니라 쓴 맛과 단 맛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미각을 자극하는 것이 묘하다. 단 것을 먹는다는 죄책감이 쓴 맛에서 오는 자기반성적 감각에 상쇄되는 것 같다고 할까. 형벌과 면죄부를 동시에 받는 모순적인 맛, 달콤 쌉쌀한 초콜릿의 매력이다.


벨기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콜릿 제조국으로 통한다. 초콜릿 하면 스위스가 아닌가 싶지만 스위스가 자국의 신선한 우유를 이용한 부드러운 판형 초콜릿을 자랑한다면, 벨기에는 미적으로도 아름답고 맛도 훌륭한 최고급 초콜릿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고디바 Godiva나 길리안 Guylian, 노이하우스 Neuhaus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급 초콜릿 제조사 대부분이 벨기에 국적을 갖고 있다.



잠시 초콜릿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보자. 초콜릿은 카카오 콩을 원료로 한다. 원산지는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다. 초콜릿은 엄밀하게 발효식품이다. 카카오 빈 안에 든 카카오 콩을 나무통에 넣고 수일 동안 발효시키면 우리가 아는 검은색의 카카오 콩이 완성된다. 고대 남미인들은 발효된 카카오를 햇빛에 건조한 후 으깨거나 갈아서 먹었다는데 이것을 원기를 회복시키는 음료, 초콜라틀 Xocolatl이라 불렀다. 초기에 끈적한 죽에 가까웠지만 아스텍인 들에 의해 점차 액체상태의 마실수 있는 음료로 발전했다.


1521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을 정복하면서 초콜릿은 유럽으로 전파됐다. 초콜릿 음료는 유럽 사회, 특히 영국에서 커피, 홍차와 비견되는 고급 음료로 유행했다. 당시 코코아는 상당한 고가품으로 부유한 일부 상류층 귀족들만이 초콜릿 하우스에서 초콜릿 음료를 즐겼다. 프랑스 상류층들은 커피보다 최음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초콜릿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1828년 네덜란드의 화학자 반 호텐이 초콜릿에서 카카오 버터를 제거하고 초콜릿 파우더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후 초콜릿 장인들의 창의력으로 다양한 형태의 초콜릿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에서 밀턴 허쉬에 의해 초콜릿이 본격적으로 대량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상류층의 음료에서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는 간식으로 탈바꿈했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유럽에서 초콜릿이 처음 상륙한 곳은 스페인이며 유행이 번진 곳은 영국이다. 초콜릿 제조의 신기술은 네덜란드에서 개발됐고 대량생산은 미국에서 이뤄졌으며 최초의 밀크 초콜릿은 스위스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대체 왜 벨기에의 초콜릿이 세계 최고가 되었을까.


벨기에 초콜릿의 역사는 17세기부터다. 브뤼셀과 엔트워프 등지에 초콜릿 장인들이 머무르면서 초콜릿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유럽에서 대표적인 초콜릿 생산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세계 최고란 명성이 만들어진 건 이보다 한참 후였다. 1912년 스위스 이민자 출신 초콜릿 장인인 장 노이하우스가 프랄린 Praline 초콜릿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부터 벨기에는 고급 초콜릿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원래 프랄린은 가열한 설탕을 아몬드나 땅콩 등에 버무린 후 식혀 만드는 달콤한 견과류 과자를 뜻하다. 여기에 착안한 노이하우스는 초콜릿 셸 즉, 초콜릿 껍질 속에 견과류, 크림, 버터 등 다양한 필링으로 속을 채운 후 봉인한 ‘벨지움 프랄린’을 만들어 냈다.


노이하우스의 성공 이후 그를 위시한 벨기에의 초콜릿 장인들에 의해 프랄린은 더 섬세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됐고 값싼 미국식 대량생산 초콜릿에 견주어 장인이 손으로 만드는 고급 수제 초콜릿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벨기에는 2000여 개의 초콜릿 매장에서 연간 17만 2000톤가량의 초콜릿을 생산하고 있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길거리엔 한 집 건너 초콜릿 가게다. 벨기에에서 카카오가 생산되지는 않지만 고부가가치를 얻은 초콜릿이 관광상품이면서 동시에 수출까지 이뤄지니 이런게 바로 창조경제가 아닐까도 싶다.



벨기에 초콜릿의 찬란한 영광 뒤에는 어둡고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유럽의 부는 대부분 식민지에서 수탈한 자원에서 비롯됐는데 벨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야심 많은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1885년 아프리카 콩고 자유국을 하루아침에 왕의 사유지로 선포하고는 곧 식민지로 전환, 가혹한 수탈을 일삼았다. 벨기에는 콩고의 카카오 농장에서 카카오를 거의 공짜로 본국에 들여왔다. 이 덕분에 벨기에의 초콜릿 장인들은 풍부한 원료를 바탕으로 초콜릿 가공기술을 마음껏 발전시킬 수 있었다.


 벨기에로서는 영광의 시절이었지만 당시 콩고는 벨기에군에 의해 천만명 이상이 학살당하고 수십만 명이 굶어 죽거나 노예로 팔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름답고 달콤한 벨기에 초콜릿 뒤에 콩고인들의 피와 땀이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초콜릿이 마냥 달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달콤함 뒤에 느껴지는 씁쓸함의 정체가 이것인가도 싶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성 전용 미식 클럽 '초코 Txoko'를 아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