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 중엔 미신에 가깝지만 기정사실처럼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가령 스테이크 겉면을 지지면 속에 있던 육즙이 가둬진다는 이야기 같은 게 대표적이다. 한때 과학적인 사실처럼 받들어졌지만 요즘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면 이제와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취급받기 십상이다. 겉면을 지진다고 해서 단백질이 비닐처럼 방수가 되는 성분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건 당장 스테이크를 구워봐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 밖에도 요리에 술을 넣고 오래 끓이면 알코올 성분이 완전히 날아간다던가(아무리 오래 끓여도 음식 내 알코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고기를 구울 땐 한 번만 뒤집어야 맛있다(정말?)는 등 어디서 듣긴 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찾아보는 일은 무척이나 수고스러운, 그럴싸해 보여 그냥 믿고 싶은 미신과 오해가 식탁 위에 오르내린다. 이 중 살펴볼 것은 바로 ‘알 텐데 Al Dente’ 파스타에 대한 이야기다.
알 덴테 Al Dente의 뜻을 직역하자면 ‘이빨로’란 뜻이다. 흔히 파스타 면이 뚝뚝 끊기다 못해 심지가 치아 사이에 낄 정도로 덜 삶아져서 나온 파스타를 일컫는 용어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파스타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파스타를 알 덴테로 먹으며 부드럽게 익혀 나온 파스타는 촌스러운 스타일 내지는, 파스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먹는 것이라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들으면 기가 차고 코가 막힐 글을 본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탈리아 사람에게 이 사이에 낄 정도로 덜 익힌 파스타를 내면 당장 식탁을 엎어버릴 수도 있다.
알 덴테는 파스타 조리 과정에서 적용되는 용어이지, 접시 위에 담긴 파스타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다시 말해 손님이 먹기 직전 접시 위에 담긴 파스타는 적어도 단면을 잘랐을 때 심지가 보일 정도로 덜 익힌 파스타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히 파스타는 삶은 면에 소스를 버무려 만드는 쉽고 간단한 면 요리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좀 더 복잡한 테크닉이 필요한 어려운 요리다.
현대 이탈리아 파스타의 핵심은 면과 소스의 일체화에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파스타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파스타 면에 유화(Emulsion)된 소스를 달라붙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잘 만든 이탈리안 파스타란 소스를 숟가락으로 떠먹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소스가 면에 한 몸처럼 달라붙어 있는 파스타를 말한다. 소스가 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지 않아야 하고, 먹고 나면 접시에 소스가 흥건하게 고여 있지 않아야 하는 게 정석이다. 파스타를 주문하면 스푼을 주지 않는 이유다. 자작한 국물과 같은 소스에 갓 삶은 면을 말아 넣고 손님이 비벼먹는 파스타는 적어도 이탈리아식은 아니라는 소리다.
파스타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오일 기반 파스타라면 올리브유에 재료를 볶아 맛 성분을 오일에 끌어내는 과정을 거친 후 물을 넣고 사정없이 섞어 소스를 만든다. 이때 물은 굳이 면수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짠 면수가 소스의 간을 망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과 기름은 완전히 섞이지 않지만 어느 정도까지 휘저어 주면 기름 입자가 미세하게 작아져 마치 물과 섞인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것이 에멀전이라고 부르는 유화 과정이다.
파스타가 삶아졌다면 유화된 소스에 넣고 버무려주는데 이 과정이 최종적으로 파스타를 망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한다. 소스에 면을 투하한 후 팬을 잡고 팔을 이용해 앞뒤로 흔들어주는 묘기 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처음엔 면과 소스가 따로 놀지만 1-2분가량 계속해서 면을 휘저어 주면 어느새 소스가 면에 철썩 달라붙는 순간이 온다. 파스타 면에 남아 있는 전분이 빠져나와 소스와 다시 한 번 섞어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일정 온도 이상의 열이 더 필요하다. 다시 말해 삶아진 파스타가 소스와 합쳐지는 과정에서 더 익혀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알 덴테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알 덴테는 과잉 익힘을 방지하기 위해 주방에서 탄생했다. 파스타 면은 냄비에서 한 번 익고, 소스가 담긴 팬 위에서 또 한 번 익는다. 만약 당신이 완전히 푹 익은 파스타를 냄비에서 건져냈다면 늦었다. 팬 위에서 소스와 한 몸이 되는 과정을 거쳐 손님 앞에 섰을 땐 이미 퍼져 물러버린 파스타가 되기 십상이다. 파스타는 알 덴테로 삶되, 손님 앞에 나갈 때에는 완벽하게 익힌 상태로 나와야 한다는 것, 이탈리아에서 파스타를 만드는 요리사에게는 기본이다.
알 덴테로 조리하는 파스타가 등장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오늘날 현대화된 이탈리아 파스타에 적용되는 부분이다. 파스타가 지금처럼 고급화되고 세련되기 시작한 것은 겨우 20세기에 들어서다. 그전까지 이탈리아 파스타는 우리네 비빔국수와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푹 삶아 익힌 면에 지천에 널린 치즈를 수북이 갈아 넣어나 토마토소스를 부은 후 되는대로 비며 먹었다.(심지어 손으로 말이다) 가난한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는 음식이었던 파스타가 고급식당에서 하나의 정식 요리로 자리잡으면서 알 덴테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큰 돈을 주고 먹는 파스타는 서민들이 먹는 그것과 확연히 달라야 했다. 의욕넘치는 요리사들에 의해 프렌치 소스 기법이 파스타에도 도입되면서 다양한 소스들이 개발됐다. 면은 듀럼 밀로 만든 파스타의 탱글탱글한 특성을 최대한 살린 가장 먹기 좋은 상태로 제공됐다.
어느 정도까지 알 덴테로 익혀야 하느냐는 각 주방이 처한 상황이나 소스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서빙에 걸리는 시간과 소스를 묻히는 시간 등을 고려해 익힘 정도를 달리해야 한다. 일반 가정이라면 봉투 겉면에 표시된 조리 시간대로 삶아도 무방하다. 소스를 묻히는 과정만 제대로 해낸다면 말이다. 듀럼 밀로 만든 파스타는 일반 밀로 만든 면과 비교했을 때 그리 쉽게 퍼지지 않으니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간혹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심지가 보이고 이에 낄 정도의 파스타를 먹었다면 ‘역시 본토에서는 알 덴테로 먹는 군’하며 감탄할게 아니라 컴플레인을 걸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분명 주방에서 조리를 잘못한 파스타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