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우 May 17. 2017

이탈리아인을 닮은 작은 고추 페페론치노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이탈리아 사람들은 정말 다혈질일까. 이탈리아에서 한동안 지내본 사람으로서 이야기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다른 유럽인들에 비해 목소리가 크고 감정의 격양이 잦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경상도에 간 서울 사람이 경상도 사람들은 항상 화가 나있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경상도 사람으로서 그것은 지역문화나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일 뿐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싶다. 화가 난 게 아니라 말투가 그냥 원래 그런 것이다.



유난히 목소리가 크고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을 두고 북부 사람들은 ‘페페론치노를 많이 먹은 탓’이라며 놀리기도 한다. 고추 섭취량과 성미 간에 상관관계가 정확히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페페론치노로 남부와 북부의 식문화가 구분된다는 점이다. 북부의 전통요리라는 것들을 살펴보면 매운맛을 내는 요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 고추, 페페론치노가 들어간 이탈리아 요리라고 하면 십중팔구 남부식이다. 특히 남쪽의 칼라브리아 지방에서 페페론치노가 많이 생산되는데 이탈리아에서도 고추를 이용한 요리 가짓수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손톱만 한 크기의 고추를 말린 이탈리아의 페페론치노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실감케 할 만큼 아찔한 매운맛을 자랑한다. 작은 크기만 생각하고 고춧가루 넣듯 요리에 팍팍 뿌려 넣으면 말 그대로 지옥의 매운맛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도 제아무리 매운맛을 좋아하는 남부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양인은 서양인이다. 그들은 매콤함이 살짝 느껴질 정도의 매운맛을 좋아하지 우리처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맵게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 요리에 쓸 때도 기름에 살짝 넣은 후 빼 고추 향만 입히거나 적은 양의 페페론치노를 잘게 부수어서 사용하는 정도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항해사들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된 고추가 이탈리아에 처음 건너온 건 1535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람들은 고추의 고통스러운 매운맛이 독이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식재료로 여겨지지 않았던 고추가 이탈리아 요리책에 처음 등장한 건 한 세기가 지난 후였다. 17세기 나폴리의 요리사 안토니오 라티니가 쓴 요리책에 '스페인식 소스 (Salsa alla Spagnola)'가 등장하는데 이 소스의 주재료가 토마토와 페페론치노다. 이탈리아보다 먼저 스페인에서 고추는 식재료로 사용되고 있었고 이 시기 고추를 재료로 한 요리법이 이탈리아로 전해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생소시지 살치차와 건조발효 소시지인 살라미에도 고추가 들어간다. 매운 살라미를 뜻하는 피칸테 살라미 Picante salami는 스페인의 초리조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고추가 유럽에 본격적으로 전래되고 식용화되기 시작한 후 각지에서 고추를 이용한 요리가 자연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피칸테 살라미는 생김새만 보면 페퍼로니 피자 위에 올려진 동그란 페퍼로니와 닮아 있다. 페페로니 Peperoni는 이탈리아어로 달콤한 고추를 뜻하는 말이지만 페퍼로니 Pepperoni는 미국에서 만든 일종의 유사 피칸테 살라미다. 돼지고기로 만드는 피칸테 살라미와는 달리 돼지고기를 비롯해 쇠고기, 칠면조 고기 등 다양한 고기들이 사용되며 단면의 입자가 매우 고운 것이 특징이다.



피칸테 살라미가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지는 반면, 페퍼로니는 인공첨가물의 힘을 빌어 단기간에 대량 생산된다는 차이가 있다. 가공 소시지가 전통 발효소시지의 풍미를 따라갈 수 없듯 페페로니와 피칸테 살라미의 풍미는 차원이 다르다.


대표적인 오일 파스타인 알리오 올리오 에 페페론치노 Aglio olio e peperoncino처럼 대놓고 매운맛을 뽐내는 요리도 있지만, 대부분은 고추를 직접 사용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매운맛을 낸다. 이탈리아의 디아볼로 피자 Diabolo Pizza는 악마 Diabolo 란 무시무시한 이름처럼 눈물 나게 매운맛을 선사해줄 것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 않다. 피칸테 살라미 Picante salami를 얇게 썰어 올린 피자인 디아볼로 피자는 매콤한 풍미는 나지만 결코 맵지는 않으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눈물 나게 매운맛을 기대했다면 실망이 크겠지만 말이다.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유럽인들은 맵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하지 않다. 눈물 쏙 빠지게 매운맛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에겐 매운 축에도 못 끼는 음식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느끼는 매운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유럽인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이탈리아에서 생활한 지 6개월째 되던 즈음이었다. 친구가 한식이 그리울 거라며 한국에서 라면 한 박스를 소포로 보내왔다. 그동안 맵고 짠 한국 음식은 거의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라 친구가 보내준 라면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밀라노나 로마 등 한국인들이 많이 있는 도시라면 모를까 당시 머물던 곳은 시칠리아에서도 구석진 곳이어서 기껏해야 중국식 간장 정도를 구할 수 있던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라면 봉지 뒷면에 표시된 조리방법을 따라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성 들여 라면 한 그릇을 만들었다. 6개월 만의 라면이라니. 벅찬 감격을 애써 뒤로 하고 기대에 차 한 젓가락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운 고향의 맛을 기대했지만 웬걸 갑자기 입안에서 전기가 통한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그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자극이 미각세포를 쉴 새 없이 공격한 것이다. 아니 라면이 이렇게도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었던가. 먹으면 입에서 불이 난다는 볶음면도 아닌, 한국에서 늘 익숙하게 먹어오던 라면이었지만 그때 그 라면은 도저히 입에 댈 수 없는 음식이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서양인들이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는 것이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말이다.



언젠가 어떤 텔레비전 방송에서 한식을 세계에 알린다며 김치를 외국인들에게 먹으라고 권유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김치를 처음 맛 본 외국인은 이내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혀를 내밀고는 연신 ‘핫, 핫’을 외치고, 김치를 준 패널은 재미있다며 깔깔거리던 그 장면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폭력에 가까운 행위였다.


매운맛은 단맛 쓴맛 신맛 짠맛과 같은 맛의 일종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통각의 한 종류다. 오죽하면 고문에 고추를 사용했을까. 자극적인 음식을 거의 접하지 않다가 갑자기 매운 음식을 먹으면 복통이 찾아온다. 이미 한국인들이 준 매운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몇 번 들락거려본 이탈리아 친구들은 라면이나 고추장을 결코 입에 대지 않았다. 워낙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둘러싸여 살고 있기에 우리는 잘 모르지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겐 우리의 매운 음식은 그들이 보기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인 것이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 남들에게도 좋을 거라는 착각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배려의 시작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추는 어떻게 유럽 식탁을 정복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