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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우 Jul 25. 2017

시간이 만들어 준 선물, 치즈 이야기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누군가는 화려한 옷과 신발, 가방 혹은 번쩍거리는 장신구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음식을 만들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바뀌었다. 발이 닿는 곳이면 어김없이 지역의 음식과 식재료에 가장 먼저 관심이 갔다.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할 때 항상 나의 넋을 빼놓게 만드는 장소가 있었으니. 바로 정육점과 와인샵, 그리고 치즈샵이다.



정육점에선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형된 다양한 종류의 고기, 그리고 햄과 소시지 등 각종 육가공품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주거지역 골목마다 하나씩은 꼭 있는 와인샵과 치즈샵에선 그 지역에서 생산하는 특색 있는 다양한 와인과 치즈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치즈샵은 약간의 용기만 가진다면 마음에 드는 치즈가 나타날 때까지 한 조각씩 시식을 해볼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중에서 한 곳만 고르라면? 주저할 필요도 없이 치즈샵이다. 한 마디로 형언하기 힘든 복잡 다양한 풍미를 가진 다양한 치즈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유럽을 여행하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이다.



사소한 치즈의 사소하지 않은 역사


  치즈는 서구의 식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유하자면 와인이 유럽인의 피요, 빵이 살이라면 치즈는 그 중간에 있는 지방쯤 된달까. (실제로도 치즈의 구성성분 대부분은 지방이다) 치즈 하면 목가적인 풍경이 연상되는 유럽 몇몇 나라를 떠올릴 테지만 사실 치즈의 고향은 유럽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5000~4000년 경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유목민들에 의해 치즈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유목민들에게 우유 보관은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젖을 매일 주기적으로 짜주어야 했는데 문제는 쓸 만큼 쓰고 남은 우유들이 곧잘 상해버린다는 것이었다. 호기심과 관찰력이 풍부한 어떤 유목민이 오래된 우유에서 액체 성분(유장)을 따라내고 남겨진 굳은 물질(응유:커드)에 소금을 뿌려 놓으면 보존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최초의 치즈가 탄생했다. 쉬이 상하던 우유를 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고 저장 가능한 고체 형태로 바꾸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치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치즈와는 달랐다. 오래된 우유를 이용해 만들다 보니 신맛이 강하고 짤뿐 아니라 질감이 좋지 않은 굳어버린 요구르트와 비슷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치즈가 나타나게 된 건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오랜 시간 노하우를 축적해온 치즈 제조자들은 동물의 위장으로 만든 용기에 우유를 보관하거나 위장 조각에 우유가 닿게 되면 치즈가 훨씬 잘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사람들에겐 마법같은 현상이었는데 이는 동물의 위장 안에 있는 레닛 Rennet이란 효소의 작용 때문이었다. 레닛의 존재가 밝혀진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치즈를 만들면 우유가 빠르게 응고되면서 보다 부드러운 질감을 얻을 수 있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이집트에서 사용된 치즈 제조기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중해를 따라 서서히 유럽으로 전해졌고 점차 유럽인의 식문화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대제국을 건설해 문명을 전파한 건 로마인들이었지만 치즈 제조기술을 꽃피운 건 그들이 야만인(바바리언)이라고 무시했던 변방의 민족들이었다. 대부분 유목생활을 했던 바바리언들에게 치즈 제조 기술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했다. 다른 염장 제품처럼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치즈는 식량이 부족한 시기를 버틸 수 있는 귀중한 식량자원이자 보다 멀리까지 장거리 원정을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전투식량이었다. 반면 곡식과 와인이 풍부한 남유럽의 로마인들에게 치즈는 주식이라기보단 간식거리이자 사치품이었다. 로마의 상류층들은 드넓은 초지가 많은 지금의 프랑스, 스위스, 북유럽 등에서 바바리언들이 만든 치즈를 선호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서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을 이용한 치즈가 제조됐다. 오늘날 전통 치즈의 원형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졌다. 고품질의 치즈로 이름을 날린 이탈리아의 파르마 Parma나 프랑스의 브리 Brie 등지에선 근교에서 만들어지는 치즈가 도시를 먹여 살리는 주요 기반산업이었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치즈는 일반 서민들에게 손쉽게 감칠맛을 낼 수 있는 편리한 조미료이자 고기 대용의 고단백 고지방 식품으로, 부자나 귀족들에게는 독특한 풍미를 주는 디저트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서양요리엔 치즈가 사용된다. 딱딱한 경성치즈의 경우 갈거나 쪼개서 각종 요리에 감칠맛을 더한다. 파스타나 라자냐 위에 수북하게 갈아서 쌓은 파르메산 치즈가 좋은 예다. 아예 치즈를 통째로 녹여 치즈 풍미를 극대화한 치즈 퐁듀 Fondue de Fromage 같은 음식도 있다.  



감칠맛 폭발하는 치즈맛의 정체


  치즈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 맛이 놀랄 만큼 다양하다는 데 있다. 제조 방식마다 차이는 있지만 치즈의 맛을 결정짓는 요소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는 젖을 제공하는 동물의 종이다. 우리에게는 우유로 만든 치즈가 친숙하지만 유럽에서는 염소와 양의 젖으로 만든 치즈도 인기가 높다. 각각 염소와 양이 가진 특유의 풍미를 담고 있어 우유로 만든 치즈와는 또 다른 차원의 맛을 선사한다. 치즈는 단일 동물의 젖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스페인의 유명한 블루치즈인 카브랄레즈 Cabrales 치즈처럼 위스키를 블랜딩 하듯 여러 종류의 젖을 배합해 만드는 치즈도 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블루치즈인 카브랄레즈 Cabrales 치즈


품종도 치즈의 맛에 영향을 미친다. 같은 소일지라도 어떤 품종이냐에 따라 우유의 맛이 다른 것처럼 치즈 맛도 달라진다.


먹이의 종류도 맛을 결정짓는 요인 중 하나다. 동일한 품종일지라도 사료를 먹었는가 풀을 먹었는가, 풀이면 어떤 풀을 먹었는가에 따라 고기의 맛도, 치즈의 맛도 달라진다. 허브를 먹고 자란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에선 허브향이 나고, 약초를 먹고 자란 양젖에서는 약초향이 은은하게 배어있다. 같은 품종일지라도 지역에 따라 치즈 맛이 다른 건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숙성 기간이다. 짧게는 2주 길게는 6주 정도 숙성해 질감이 크림처럼 부드러운 연성 치즈를 제외하고 단단한 경성 치즈의 경우 오래 숙성할수록 본래 치즈가 갖고 있던 감칠맛과 향이 배가 된다. 치즈 안에 있는 효소가 단백질과 지방 분자를 더 맛있는 작은 조각으로 자르는 분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길 수록 분해가 더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데, 다시 말해 꾹 참고 기다리면 더 맛있는 치즈를 먹을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 시간이 치즈에게, 아니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파르미지아노 레지나노와 더불어 대표적인 이탈리아 경성치즈인 그라노 파다노 Grano Padano 치즈 공장의 숙성실


흔히 '파르메산(파마산) 치즈'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경성 치즈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최소 1년 이상 숙성한 후 시장에 내는 것이 원칙이다. 1년 숙성된 치즈와 3년 숙성 치즈는 겉절이 김치와 묵은지처럼 그 맛과 풍미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난다. 그만큼 가격도 차이가 많이 나며 먹는 방법과 그 쓰임새도 다르다.


요리사들은 맛의 균형을 고려해 요리에 사용할 치즈를 신중하게 고른다. 치즈의 풍미를 극대화시키겠다는 특별한 의도를 지닌 요리가 아니고서야 풍미가 너무 강한 치즈는 요리에 직접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치즈의 강한 풍미가 되려 음식 맛을 지배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맛이 강한 장기 숙성된 치즈들은 특유의 맛을 음미할 수 있도록 디저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연치즈와 가공치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치즈란 전통방식으로 만든 자연치즈를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닐로 낱개 포장된 매끈한 가공치즈와는 다르다. 19세기까지 유럽에서 개성 있는 자연치즈들이 만들어지고 있던 것과는 달리 미국에선 산업화와 맞물려 대량의 가공치즈들이 생산됐다. 20세기 들어 유럽은 두 차례 큰 전쟁을 겪으면서 낙농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를 틈타 대량 생산된 미국의 값싼 가공치즈가 유럽에 상륙했다. 자연치즈에 식품첨가물을 섞어 만든 가공치즈는 전통방식으로 만든 자연치즈에 비해 맛과 풍미는 떨어졌지만 당장 먹을 치즈가 부족한 유럽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서 열린 스페인 치즈 박람회. 다양한 치즈 메이커들이 참여해 자신들이 만든 치즈를 뽐내고 있다.


유럽은 낙농업을 다시 일으켜 자연치즈를 만드는 것보다 공장을 지어 가공치즈를 대량 생산하는 쪽을 택했다.  가공 치즈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한때 유럽의 자연치즈 산업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지만, 식생활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자연치즈의 가치가 점차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낙농업이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서 가치를 주목받자 유능한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발걸음을 옮겨 치즈 산업의 발전을 주도한 것이다. 미식문화의 성장과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소규모 생산자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유럽의 치즈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금 재현하고 있는 추세다.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치즈 꽤나 만드는 나라라고 하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를 꼽는다. 다른 나라들도 각자 내세우는 전통 치즈가 있긴 하지만 그다지 대중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서 언급한 치즈 강국의 치즈가 품질과 맛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비싼 자연치즈보다 값싼 가공치즈들을 더 선호해 치즈샵에서 아예 자국 치즈를 취급하지 않는 나라도 꽤 있다.


오스트리아 빈 Wien의 한 치즈가게.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치즈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소비자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는 끊임없는 시도와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체코의 치즈 제조사인 ‘라 포르마제리아 그란 모라비아 La Formaggeria Gran Moravia’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이탈리아 치즈제조 방식을 도입해 자국의 원유로 치즈를 만들어 내는 회사다. 이탈리아 치즈를 뛰어넘는 치즈를 만들지 못한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배워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모방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지만 이런 시도는 분명 가치가 있다. 이렇게 배운 기술이 고품질의 체코 치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될 테니 말이다. 언젠가 이탈리아 치즈와 어깨를 견줄만한 체코의 치즈가 만들어지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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