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음, 후추를 너무 많이 넣었는걸.”
요리학교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지적이다. 평소 하던 식으로 통후추를 무심코 팍팍 갈아 넣는 버릇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미각으론 후추를 ‘적당히’ 친다는 의미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평생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온 탓일까. 조금 넣으나 많이 넣으나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같은 지적을 받자 한동안 후추를 보면 식은땀이 나는 바람에 손대기가 꺼려졌다. 후추의 맛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지기 시작한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자극적인 음식을 멀리하고 덜 자극적인 음식만 먹다 보니 재료의 맛을 더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후추 공포증이 사라진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다.
후추는 서양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향신료 Spice 중 하나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향신료는 여러 가지 강한 풍미와 향기가 나는 식물성 물질로 열대성 식물에서 주로 얻으며 양념에 사용한다. 우리가 잘 아는 후추 Peper를 비롯해 정향 Clove, 육두구 Nutmeg, 메이스 Mace, 생강 Ginger, 시나몬 Cinnamon, 아니스 Anice 등이 향신료에 속한다.
간혹 허브 Herb와 향신료를 혼동하기도 하는데 이 둘은 다르다. 바질 Basil이나 로즈메리 Rosemary, 타임 Tyme, 민트 Mint 등으로 대표되는 허브는 주로 식물의 잎에서 얻는 반면 향신료는 뿌리나 꽃, 줄기 등에서 얻는다는 차이가 있다.
적당히 따뜻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는 허브와 달리 향신료의 원산지는 무더운 열대 지역이다. 향신료가 독특한 향과 맛을 갖게 된 이유는 환경과 연관이 있다. 기온이 높고 습한 열대는 병원균이나 해충 박테리아 등이 번식하기 쉬운 환경이다.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화학물질이 바로 향신료가 가진 독특한 아로마 Aroma의 정체다. 항균성분이 있어 음식에 사용하면 인체에 해로운 박테리아의 서식을 억제해주는 역할도 한다. 동남아나 인도 등 무더운 지역에서 음식에 향신료를 듬뿍 넣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국의 향기, 향신료
향신료는 언제부터 유럽으로 건너오게 되었을까. 향신료는 인류가 교역을 시작할 때부터 함께 해온 오랜 기호품이었다. 당시 후추를 포함한 대부분의 향신료는 인도에서 지중해까지 육료를 통해 거래됐다. 먼 길을 거쳐 왔으니 값이 비싼 건 당연했다. 로마가 번영을 누리던 무렵 상류층들은 재산을 털어서라도 향신료를 구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향신료를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느냐는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주는 척도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비싼 향신료를 음식에도 적극 활용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상류층의 문화는 빠르게 유행이 되었다. 로마의 식도락가 아키피우스가 남긴 저작은 향신료가 당시 어떻게 음식에 다양하게 사용되는지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다.
향신료 구경을 해보지 못했던 로마제국 변방의 민족들도 점차 이 향신료의 마력에 서서히 빠지게 됐다. 여기엔 종교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로마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가 교세 확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향신료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제의 때마다 각종 향신료를 섞은 향료를 태워 사람들에게 마치 현실이 아닌 곳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향신료가 주는 낯설고 묘한 향기는 그리스도교인들이 강조하는 천국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정체모를 향은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중세에 걸쳐 낯설고 이국적인 향을 선사해주는 향신료는 현실의 지루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자극제로 인기가 높았다. 일상적으로 먹던 지루한 요리에 향신료를 첨가하면 식욕이 자극되는 효과가 있었으며 효능 좋은 약재로 사용됐다. 무엇보다 영리한 상인들에 의해 강력한 최음제로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가 높았다. 향신료에 육체적인 자극을 직접 주는 성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국적인 향이 주는 묘한 분위기는 중세인들의 성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향신료를 향한 욕망의 항해
15세기까지 유럽의 중심은 지중해였다. 동방과의 무역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동쪽에 위치한 베네치아가 고대부터 향신료 무역항으로 번영할 수 있었던 건 지리적 이점 덕이었다. 동방의 무역품은 지금의 터키 지역인 발칸반도까지 육로로 수송됐고, 여기서 배를 통해 베네치아에 입항한 뒤 다시 육로와 해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향신료는 주로 인도에서 아라비아를 통해 베네치아에 당도했다. 여러 손을 거친 향신료는 산지 가격보다 대략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됐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동방과 서방의 무역경제 질서는 15세기 말 급변하게 된다. 서방과 지중해 패권을 놓고 대립하던 아랍의 오스만 제국이 마침내 지중해를 장악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서방에 대한 압박의 일환으로 향신료를 비롯한 여러 무역을 통제했다. 동쪽에서 향신료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렇잖아도 비싼 향신료의 값을 더욱 올렸다. 이미 향신료는 유럽인들에게 단순한 조미료 그 이상의 것이었다. 치솟는 향신료 값에 참을 수 없게 된 서유럽 여러 국가들은 인도와 직접 무역을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하고 지중해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유럽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넘어간 것이다.
지중해에서 오랫동안 변방이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삽시간에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스페인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기독교 포교와 더불어 인도에서 막대한 양의 후추를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서쪽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 아메리카였다.
대서양에서 출발해 인도에 맨 먼저 다다르는 영광을 차지한 사람은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스쿠 다 가마였다. 그는 콜럼버스처럼 대서양 서쪽으로 향하는 대신 남쪽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했다. 다 가마를 후원한 포르투갈 왕실과 상인들은 그가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로 무려 60배가 넘는 이윤을 남겼다. 이 사실이 유럽 전역에 알려지자 너나 할 것 없이 인도로 향하는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열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 네덜란드, 오스만 제국은 당시 전 세계 바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인도 항로를 가장 먼저 개척한 포르투갈은 인도에 향신료 무역을 위한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는 훗날 영국과 네덜란드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다시말해 유럽이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수탈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향신료에 대한 유럽의 욕망은 결국 유럽과 더 넓은 세계가 만나는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이는 결국 유럽이 세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유럽이 새로운 번영에 휩싸인 사이, 인도와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향신료를 채취하는 데 동원됐다. 유럽에서 비싼 값에 팔리는 향신료지만 그들이 향신료를 채취해서 가질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향신료를 채취하기 위한 유럽 열강들의 착취는 근대까지 이어졌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정향 가격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인도네시아에서 수만 그루의 정향나무를 태워 없애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유럽에서 천국을 상징했던 향신료가 원산지를 처참한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건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향신료는 어떻게 음식의 맛을 한 층 더 살릴까
서양 음식이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맛과 향, 즉 향신료 때문이다. 향신료는 재료 자체의 맛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음식에 독특한 향을 입혀준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를 생각해보자. 구운 고기를 처음엔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먹다 보면 금방 질리기 마련이다. 이때 고기에 후추를 뿌리면 알싸하고 매운맛이 한 겹 더해지면서 단조로운 고기의 맛이 한층 더 복잡해진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맛이 입체적이면 맛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무의식적으로 구미가 계속 당기게 된다. 즉, 향신료를 쓰면 좀 더 오래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음미하며 먹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향신료는 고기뿐 아니라 수프 같은 국물요리부터 제빵, 와인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사용된다. 감자 퓌레를 만들 때 맛이 밋밋해지는 것을 피하려면 육두구와 후추를 적당히 넣어 주는 것이 좋다. 사과와 시나몬의 조합은 빵이나 쿠키, 차를 만들 때 널리 사용되는 조합이다. 각 향신료마다 어울리는 음식은 있지만 정답은 없다. 기호에 따라 향신료를 첨가하기도 하지만, 특정 향신료의 향과 맛이 곧 음식의 정체성이 되는 경우도 있다. 겨울철 독일이나 북유럽 등지에서 사랑받는 뱅쇼나 글루바인과 같은 뜨거운 와인에는 시나몬과 정향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서양요리에서 향신료는 음식의 풍미를 다층적으로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향신료 그 자체가 주재료인 인도나 동남아 요리라면 모를까, 너무 많이 사용하는 건 오히려 음식의 맛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특히 육두구는 독성이 있어 자칫 과도하게 사용하면 건강에 해로우니 조심해야 하는 향신료다. 무엇이든 적당히 쓰는 것이 약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사진과 뒷 이야기들은 페이스북(www.facebook.com/jangjunwo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