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온 목적은 단 하나였다. 1990년대 이른바 분자요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 스페인을 단번에 세계 미식의 중심지로 만든 페란 아드리아 Ferran Adrià 셰프가 직접 아침마다 장을 봤다는 보케리아 시장 Mercat de la Boqueria을 보기 위해서였다. 건축계의 거장 가우디 Antoni Gaudí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있는 도시자 스페인 축구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에서 고작 시장 구경이라니 할 수 있겠지만 이곳엔 다른 시장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 있다.
어떤 지역의 식문화를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시장에 가보는 것이다. 무엇이 나고 자라며 무엇을 먹는지 한눈에 파악하기에 시장만큼 좋은 곳이 없다. 보케리아 시장은 무려 8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217년 구도심 입구 근처에서 몇몇 상인들이 좌판을 깔고 양이나 염소, 돼지 등 도축된 고기를 판 것이 시초다.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고기에서 과일 생선 등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해지면서 규모가 커졌다. 19세기 중반 이뤄진 대대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지금 있는 람블라다 거리 인근에 지어진 현대식 구조물로 시장이 통째로 이전됐다. 그동안 보르네 Bornet, 파야 Palla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이전을 기점 하여 보케리아 시장으로 명칭이 굳어졌다.‘보케리아 시장에서 못 구하면 스페인 어디서든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에선 갖가지 식재료를 판매하고 있다. 정육부터 가공육, 해산물과 치즈, 와인, 과일, 디저트, 빵 등을 파는 소규모 점포들이 들어서 있는데 없는 것이 무엇일까 찾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다.
다채로운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시장의 진정한 재미는 역시 먹는 것이다. 시장에서 바로 공수한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해 즉석에서 볶거나 구워 간단한 요리를 만드는 이곳의 작은 식당들은 언제나 손님들로 붐빈다. 겉보기엔 우리네 재래시장 안의 간이식당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무시해선 곤란하다. 몇몇은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사용할 법한 최신식 주방시설과 인력을 제대로 갖추고 미슐랭 식당 못지않은 훌륭한 음식을 내기도 한다.
보케리아의 전설, 피노쵸 바
보케리아 시장 안의 여러 식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피노쵸 바 Pinotxo Bar다. 이곳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바로 피노쵸 바의 소유자이자 마스코트인 후아니토 바옌Juanito Bayen 때문이다. 올해 여든이 넘은 바옌은 적어도 보케리아 시장 안에선 FC바르셀로나의 축구선수‘리오넬 메시’에 맞먹을만한 인지도를 가진 유명인사다. 무려 75년간 한 곳에서 자리를 지킨 그는 보케리아의 터줏대감이자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매일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6시 정각에 칼 같이 가게 문을 여는 그는 ‘아침을 여는 성자聖者’로도 불린다. 이른 시간에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에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이들에게 피노쵸 바는 성지와도 같다고 해 붙여진 별명이다. 올해 여든셋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같은 생활을 한다는 그를 보면 존경을 넘어 경외감마저 든다.
유명세 때문인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해대는 통해 바옌은 인사받으랴 주문받으랴 음식 갖다주랴 바빴다. 그러면서도 손님들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환한 미소를 보이는 일은 잊지 않았다. 바의 단골이었던 페란 아드리아는 “그는 진정한 미식이란 단지 음식을 넘어 기쁨과 친밀감, 애정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다”며 스승으로 지켜 세우기도 했다. 따뜻한 정 사람의 향기가 느껴지는 한 끼의 식사 경험, 그것이 피노쵸 바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자 바옌의 매력이다.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면 선택할 것은 두 가지다. 고기냐 생선이냐. 사실 메뉴가 있긴 하지만 특별히 스페인 요리에 상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메뉴를 봐도 막막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육류와 해산물 중 종류만 선택하면 알아서 요리를 갖다 주는데 외국인의 입장에선 무척 편하기도 할뿐더러 무엇이 나올지 은근 기대를 품게 하는 재미가 있다.
옆 테이블에 올려진 싱싱한 생선을 막 보고 자리에 앉은 터라 주저 없이 해산물을 주문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바옌이 가져다준 요리는 알루비아스 콘 칼라마르 시토 Alubias con calamarcito. 익힌 강낭콩을 꼴뚜기와 함께 오일에 볶아낸 요리다. 콩의 구수한 맛과 진득한 질감이 짭조름한 꼴뚜기에서 나는 바다 내음과 입안에서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꽤 맛이 있다. 여기에 약간의 비네거 소스가 곁들여져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맛을 산미가 균형 있게 마무리해준다. 한 접시를 말끔히 비우고 추가로 구운 새우, 생굴을 시켜 먹었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출레타Chuleta(스페인식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어느 메뉴 하나 빠지지 않을 만큼 맛이 훌륭했다. 식재료의 신선도와 활기찬 시장 분위기도 한몫했겠지만 인상적이었던 건 완벽할 정도의 '간'이었다.
음식의 맛을 결정짓는 소금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소금이다. 소금은 인류가 자연에서 처음 발견한 가장 원초적인 조미료다. 페란 아드리아는 소금을 “요리를 변화시키는 단 하나의 물질”이라고 했다. 음식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맛의 조화, 향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간이다. 소금은 단지 짠맛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쾌한 맛과 향을 줄여주는가 하면 식재료가 원래 가지고 있는 맛과 향을 더 선명하게 해주기도 한다.
어떤 요리가 ‘맛이 있다’는 의미는 일차적으로 간이 잘 맞춰졌다는 의미다. 간이 맞다는 건 재료의 맛과 염도가 적절히 잘 어우러져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과 같다. 요리학교에 실습을 할 때나 주방에서 일할 때도 항상 셰프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소금은 넣었어?”다. 매번 들을 때는 잔소리 같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늘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간의 세기는 다를 수 있지만 어떤 재료의 맛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는 염도엔 기준이 있다. 재료의 맛에 더 신경을 쓰면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익힌 감자를 썰거나 혹은 계란 프라이에 소금의 양을 세 단계로 뿌려보면 각각의 음식이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각 재료의 맛이 살아나는 지점을 정확히 맞추는 것이 요리사의 기본이며, 요리실력을 가늠하는 척도도 간이다. 간을 잘 맞춘 다는 건 식재료가 가진 특성, 즉 음식이 가장 맛있어지는 최적의 염도를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분명 레시피대로 똑같이 했는데 결과물의 맛이 시원찮은 이유는 조리 상황에 맞게 제대로 간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다. 음식을 만드는 도중 계속 맛을 보고 간을 조금씩 맞춰 가면 요리 초보자라 할지라도 맛있는 요리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보케리아 식당들의 주방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소금을 쓰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싱싱한 해산물을 철판에 볶아 거대한 접시에 담고는 그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굵은소금을 함박눈처럼 펑펑 뿌려댔다. 무심한 듯 보여도 막상 맛을 보면 재료와 짠맛의 조화가 놀랍다. 식재료와 소금의 만남. 그 완벽한 지점을 찾아내는 건 온전히 시간과 노력의 산물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는?
기자 생활을 하다 요리에 이끌려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를 졸업하고 시칠리아 주방에서 요리를 배웠습니다. 요리란 결국 사람, 공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유럽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방랑 중에 보고 느끼고 배운 음식과 요리, 공간과 사람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절찬 판매 중인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글항아리, 2017)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