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마침
'수영 마스터'가 이번 여행의 목표라던 아이는 여행 첫날부터 매일 수영을 시작했다.
웨스틴 호텔의 수영장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높은 빌딩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어, 그 풍경이 정말 장관이었다.
게다가 마치 사우나를 연상케 하는 더운 날씨 덕분에 차가운 풀에 몸을 담그면 말 그대로 수영할 맛 이 났다.
심지어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다녀온 날도 그랬다.
더위에 지쳐 열사병이라도 난 줄 알았던 바로 그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아빠와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아픈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틀 동안 호텔 옆 빌딩 1층에 위치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집 네스프레소 캡슐 커피 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 연속 카페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남편과 아이가 수영하는 동안 나만의 자유시간을 갖고 싶었고,
둘째, 커피를 마시며 나도 저 직장인들과 함께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 해외 취업에 도전해 볼 걸, 기회를 잡아볼 걸, 더 열심히 공부 할 걸'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붐비는 빌딩 아래 카페를 나서면,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빌딩으로 갈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뜨거운 햇살과 잦은 소나기로 인해 대부분의 야외 자석이 빌딩의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제 지나쳤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간판에 생소한 단어가 많이 보여서 그냥 지나갔던 곳이다. 왠지 저 많은 메뉴 사이에 커피도 있을 것 같아 호기심이 생겼다.
메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세상에! 음료가 대부분 3불 미만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알파벳에 순간 눈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용기를 내어 사장님에게 말을 걸었다.
난 이십 대 초반,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살았더랬다.
그때 익힌 생존 영어 덕분에, 지금까지도 글로벌 생존 스킬을 유지 중이다.
"익... 익스큐즈미?"
다행히도 가게에는 친절한 사장님이 있었고,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메뉴를 주문할 수 있었다.
나는 아주 달달한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는데, 그 맛이 정말 환상적이었다.
우리나라 믹스커피에 동남아의 이국적인 향이 더해졌다고 설명하면 어느 정도 상상이 될까.
2불 50센트를 주고 사온 달달한 아이스 라테와 편의점에서 산 Soy Milk다.
‘Nutri Soy Milk’는 두유인 줄 알고 샀는데, 너무 싱겁고 밍밍해서 당황했다. 기대했던 고소함은 없고, 마치 두부 물을 마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커피 한 잔에서 행복을 찾았으니, 두유의 배신쯤은 그냥 웃어 넘기기로 했다.
멋들어진 빌딩 사이사이엔 소박한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시간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가게에서 식사를 하거나 테이크아웃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풍경은 화려한 관광지에서 느낄 수 없는 싱가포르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유명한 명소를 방문하고,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지만, 내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이런 소소한 순간들이다.
물론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는 그 명성만큼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도, 우리에게도 소중한 순간들은 꼭 높은 빌딩이나 화려한 경험 속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할 땐 서로 배려하며 즐기고, 따로일 땐 각자의 방식대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니 여행이 더 편안하고 즐거웠다.
남은 일정도 이렇듯 자연스럽게 흐른다면,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또 다른 소중한 순간들이 찾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