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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걷는여자 Aug 27. 2022

아리스토파네스 희곡 <구름Nephelai>

21세기의 궤변론자들

『구름Nephelai』은 고대 그리스 작가 아리스토파네스(B·C445?~B·C385?)의 희곡이다. 작품에는 궤변의 신神인 구름여신이 등장한다. 왜 구름일까? 구름의 형태는 수시로 바뀐다.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논리에 의해 참과 거짓이 바뀌는 삿된 말의 은유이다. 당시에는 페리클레스 이후로 아테네 민주정이 부흥기에 이르렀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사회혼란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건전한 보수주의자로 신식 철학, 소피스트의 신식 교육, 전쟁과 데마고그(선동 정치가)의 반대자로서 시사 문제를 희극적으로 풍자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구름』은 소피스트를 주제로 한다. 선악을 불문하고 법정이나 의회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변론술을 가르치는 세태를 익살맞게 비판한다. 원래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사람, 또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플라톤(B·C427~B·C347)이래로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 궤변론자라는 의미로 격하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현자 중 하나인 소크라테스(B·C470년~B·C399년)를 소피스트로 등장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말들은 제자 플라톤에 의존한 것이다. 보편적 도덕과 불변의 진리를 추구하던 현자賢者로 묘사되던 소크라테스가 『구름』에서는 가치 상대주의에 빠진 소피스트로 패러디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 인물에 대한 상반된 시선, 소크라테스는 생전에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았기에, 어느 모습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값비싼 자동차로 자신의 부와 경제적 능력을 과시하듯이, 약 2500년 전 희랍 시대의 젊은이들 또한 많은 비용을 들여 말을 기르거나 마차를 몰고 다녔나 보다. 말을 좋아하던 허영기 많은 아들 때문에 빚을 지게 된 스트레프시아데스는 고민 끝에 묘수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변론’을 배워 재판에서 이기는 전략이다. 그는 허름한 옷에 맨발의 토론자로 유명하던 소크라테스를 찾아간다. 많은 수업료를 내고 엉터리 논리를 배우게 되는데 나이 탓으로 둔해진 머리로는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대신 아들 페이딥피데스가 변론술 훈련을 받는다.

스트레프시아데스: "오, 얘야, 장하구나! 네 얼굴을 보니 기쁘기 한량없다. 네 몸엔 벌써 부정하고 반박하는 습관이 배어 있구나. 그리고 네 얼굴에는 그런 말들이 벌써 빛나고 있어. 또 가해자를 오히려 피해자로 보이게 하는 몰염치도. 너의 눈초리는 정말 아티카풍이 되어 있어. 자, 전에 이 아비가 파산한 건 너 때문이었다. 이제는 네가 이 아비를 구해 낼 차례다."​

ㅡ구름, 『아리스토파네스 희곡선』, 최 현 옮김​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채권자들을 쫓아내고 의기양양해 하던 스트레프시아데스. 그는 훌륭한(?) 궤변가가 되어 돌아온 아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시인에 대한 논쟁을 하다가 구타당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에게 욕을 하고 발길질을 하면서도 뻔뻔한 궤변을 늘어놓는 아들을 보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게 된다. 자식이 부모를 구타하면서도 논리를 앞세워 이를 합리화하는 반도덕적 상황을 통하여 변론술이라는 신식교육을 비난함과 동시에 ‘가치 상대주의’의 허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여기서 소피스트의 상대주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주의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절대적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은 특정 상황이나 상호 간의 관계에 따라 그 참과 그름 또는 가치가 결정된다는 입장(이종관 교수)”, 즉 기준과 맥락에 따라 진선미眞善美가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상대주의는 '다름'을 인정해주는 훌륭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는 상대주의적 가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전제의 타당도는 없고 논리만 앞세운 상대주의는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 균형감각을 상실하여 중력을 잃어버린 상대주의는 타락을 방기한다. 양심을 잃어버린 상대주의는 도덕적 해이가 된다. 배려를 잃어버린 상대주의는 민폐가 된다. 도덕을 잃어버린 상대주의는 범죄가 된다. 양심·배려·도덕이 빠진 상대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잘못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추태와 범법행위가 드러났지만 반성은커녕 교묘히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과 이들을 변론이라도 하듯 왜곡된 뉴스를 쏟아내는 언론을 보면서 중력을 잃어버린 21세기의 궤변은 ‘구름’을 넘어 사회를 병들게하는 미세먼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매거진 《바닥》 2022 여름호 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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