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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걷는여자 Jun 05. 2020

치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

공지영 앤솔로지(선집)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

334.

내 슬픔 하나를 두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 채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남의 상처를 헤집는 것일까.

-<즐거운 나의 집>

     

 20대의 전부를 내 슬픔 하나에 정신이 팔려 남에게 상처 주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폭력과 이혼이 없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은 모두 나만큼은 아프지 않을 거라고, 나만 등이 굽어지는 아픔을 짊어지고 있다고 피해의식에 절어 살았었다. 부친의 암 진단으로 억장이 무너진 친구의 울음을 보고도 멀리서 서성거리기만 했던 나, 친구의 슬픔을 껴안아 주지 못할 정도로 내 안에 갇혀 있던 나, 더는 상처 받지 않는 게 삶의 목표라도 되는 듯 투명한 유리막을 치고 방어적으로 살아왔던 나, 그런 나와 화해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284.

온기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인간의 영혼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또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도 한때, 그것도 모르고 살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여러 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의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 이미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고 죽음 안에서 죽음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차마 죽을 용기는 없어 꾸역꾸역 살아냈다. 그러다가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잘 이해해 줄 것만 같은 한 사내를 만나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안전한 도피처를 갖고 싶었다. 나를 위해 그 사내가 필요했다. 내가 사랑을 줬으니 그도 내게 사랑을 줘야 한다고 떼를 쓰는 일이 반복됐다. 아이가 태어나자 삐거덕 거리는 일은 점점 더 많아졌다. 서로의 상처를 헤집는 일이 당연한 듯 반복되었고 사랑으로의 도피도 실패한 것만 같았다. ‘나도 잘 모르는’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다고 믿는 건 완전한 허구였다.       

     

02.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게는 어려운 그 말들을 하시고야 마는 군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을 말입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어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몸부림은 그것을 직면하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의 상처가 아이에게 되물림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함은 절망감의 바닥을 치고 나와 방향을 돌려 스스로를 가두던 유리벽을 박차고 나오도록 이끌었다. 상처에서 도망치려 할수록 상처가 반복되는 이유, 사랑에 집착할수록 사랑에게서 배신당하는 이유. 내가 ‘사랑’이라고 움켜쥐고 있던 게 정말 ‘사랑’인지 부터 직시해야 했다. 나도 나를 잘 모르면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믿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가 온전히 받아주길 바라면서도, 나는 그를 내 뜻대로 바꾸고 싶어 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뒤안길에는 그의 행복이 아닌 나의 행복만이 주된 관심사였다는 사실. 나의 이기심과 모순을 마주하던 순간 내가 사랑이라고 우기고 있었던 건 산산이 부수어졌다. 내 마음이 일그러져서 그를 바로 보지 못했음을,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기에 그를 사랑하는 법이 서툴렀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여기’가 평화롭지 않다면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상처에서 도망치는 것 또한 상처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집착은 곪아터진 상처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그것이 흘러가도록 두었을 때, 상처를 허락했을 때, 치유는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어떤 사건이든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때론 한계 짓던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일이 수반된다. 경계선 위에서 수없이 번민하고 아파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넘어섰을 때 더 넓은 품으로 삶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삶에 대한 사랑’이자 ‘희망’이라고 부르며, 다시 사랑할 용기를 회복하는 것이 ‘치유’라고 믿는다.

     

174.

결국 그들이 사형수이든 작가이든 어린아이이든 판사이든,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실은,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이외의 것은 모두가 분노로 뒤틀린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진짜라는 것.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사랑 아닌 것들이 비워진 자리엔 사랑이 있었다. 물에 사는 물고기가 물을 모르듯, 숨을 쉬고 있다는 거 자체가 이미 사랑의 증거라는 걸 몰랐다. 삶이 지속되는 한 사랑은 계속된다. 사랑 아닌 것들을 비워내는 과정 속에 상처와 치유가 있고, 눈물과 한숨과 기쁨은 삶이 다 하는 날 까지 계속 순환 될 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다른 표현이므로, 나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연습할 것이며, 기꺼이 상처를 허락할 것이다.  

     

329.

그것이 벼랑인 줄 알면서도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나날의 기록이라고 해도 좋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누구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속수무책으로 느껴졌던 운명 때문만도 아니고 실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잃어버린 채로 서른 살에 도달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더 많이 웃고 울고 떠들고 달려가고 싶다.

그것이 먼 훗날 또한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같이 기억된다 해도,

나는 이제 내게 주어지는 잔을 피하지 않고 받고 싶다.

-<상처 없는 영혼/개정판 서문>

     


**인문 매거진2020. 여름  《바닥》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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