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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서로의 세계를 흔들어 깨우는 '환대'의 윤리

— 종두와 공주, 세상의 외각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껴안다.

by 느리게걷는여자

<오아시스>는 관객이 ‘옳다/그르다’라는 판단을 잠시 내려놓게 만드는 영화다. 전과자와 중증장애인이라는 가장 취약한 두 인물이 서로에게 기댈 틈 하나를 발견하는 과정은 불편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들의 관계는 통념을 깨뜨리지만, 그 깨짐 속에서 관객은 ‘사랑이란 무엇인가, 환대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이 영화는 단지 비극이나 연민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서로를 변화시키고, 서로를 사람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윤리적 성장의 기록이다.


1. 문 앞에 앉은 남자와, 빛을 붙잡지 못하는 여자

영화는 세상의 중심에서 튕겨져 나온 두 인물을 고독한 경계에 세워 놓는다.


문 앞에 주저앉은 한 남자가 있다. 홍종두(설경구). 한겨울인데도 그는 얇은 반팔 티셔츠 차림이다. 몸이 아니라, 삶 자체가 추운 사람만이 입을 수 있는 옷차림이다. 전과 3범으로 출소 후, 종두가 가장 먼저 찾은 집 현관 앞 문틈에서는 광고 전단지만 바스락거린다. 가족들은 이사 소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는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문 앞에 주저앉아버린다.


"너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이 문장은 직접적으로 표현 되지 않았지만, 종두의 등을 타고 스민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자, 그를 환대하지 않는 세상의 고독한 선언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공주의 시간이 흐른다. 햇빛이 방바닥에서 흔들리지만, 그녀의 손은 그 빛을 붙잡지 못한다. 중증 뇌성마비를 앓는 한공주(문소리)는 누워 있는 동안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조용히 기다리지만, 문틀 너머의 그림자만이 그녀 곁을 스쳐 간다. 가족에게조차 '돌봄의 대상'이자 '불편함'으로만 존재하는 그녀는 세상의 소음에 갇혀 있다.


종두와 공주. 둘은 아직 서로를 모르지만 이미 같은 곳에 있다.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이 서 있는 바깥, 그 고독한 경계에.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세상의 외곽에서, 서로의 그림자를 닮아간다.


2. 가장 처음 열린 문 — “예쁘다”

종두가 공주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들의 관계는 가장 위험하고도 불편한 윤리적 시험대에 오른다. 낯선 남자의 등장에 공주의 몸은 순간 굳어버리고, 관객은 불안에 휩싸인다. 실제로 종두는 충동적인 강압적 행동으로 인해 관계의 문을 닫아버릴 뻔한 과오를 저지른다.


그러나 종두의 시선에는 이상하게도 탐욕도, 연민도 없었다. 어쩐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시선. 그리고 종두가 공주를 마주하며 뱉은 단 한 마디.

"예쁘다."

이 한마디는 영화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첫 '환대'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환대란 타인을 나의 범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종두는 공주의 몸의 강직도, 말의 더듬거림도, 세상과 가족이 부여한 '장애인'이라는 딱지도 모두 걷어낸다. 그는 어쩌면 세상의 편견을 가장 덜 학습한 사람이기에, 그녀를 '장애인' 이전에 한 사람, '한 여자'로 본다.


그 순간 공주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이렇게 '존재 그 자체'로 불린다. 그의 시선에는 순수한 인정(Recognition), 조건 없는 환대(Hospitality)가 있었다.

"나는 온전히 보일 수도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이 그녀 안에서 조용히 깨어난다.


3. 둘만의 세계가 만들어지던 밤들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계는 초라하지만 빛난다. 카센터 차고의 기름 냄새 속에서 먹던 짜장면 한 그릇. 낡은 탁자 위에 흩어진 종이 조각들, 서로를 향해 번지는 어설픈 웃음. 세상은 그들을 위험하고 미숙한 존재로 보지만, 그들이 만드는 장면은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호흡으로 가득하다.


지하철 막차 시간에 쫓겨 종두가 공주를 업고 전력으로 달리는 밤. 종두의 어깨 위에서 공주는 처음으로 사랑받는 다는 것을 감각으로 익힌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강하게 서로의 존재가 서로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4. 사랑의 기술- '능동적 사랑'으로 나아가는 과정

에리히 프롬이<사랑의 기술>에서 말한 사랑의 네 요소 — 앎(상대를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

배려(상대의 삶과 행복을 위한 실천), 책임(관계의 지속을 위해 감당하는 행위), 존중(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 영화 속 둘은 이 네 가지를 배워가는 장면의 연속이다.


존중: 공주는 스스로 립스틱을 고른다. 이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치장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다. 타인을 향한 존중은 결국 나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세우려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종두는 공주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며, 그녀의 의사를 읽어내기 위해 인내한다.


책임: 종두가 충동적으로 공주를 껴안으려 했던 '실수'(위험한 강압) 직후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행위는 단순히 상대를 돌본다는 의미 이전에, 타자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윤리적 응답이다. 진정한 책임은 관계를 파괴할 뻔한 자신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고, 다시 돌아와 더 큰 신뢰를 쌓으려는 '용기'로 증명된다. 이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결심이자, 관계의 지속을 위해 스스로 감당하는 가장 무거운 행위이다.


배려: 종두가 공주를 업고 달리는 장면은 몸의 무게와 체온으로 나누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배려는 말이나 감정이 아닌, 행위로 증명하는 실천이다.


앎: 사랑은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며 쌓이는 이해의 층위다. 종두는 공주의 몸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어떤 자세에서 편안한지 하나씩 배워나간다. 공주는 종두가 불안해질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지를 조용히 익힌다.


이들은 미숙했지만, 관찰과 기다림으로 상대를 배우는 법을 익힌다. 이들은 '돌봄을 받던' 수동적 존재에서, '능동적 사랑'의 주체로 성장하는 법을 익혀간다.


결론 — 환대받지 못한 둘이 만든 가장 따뜻한 문

둘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금지되었기 때문’도, ‘연민을 자아내기 때문’도 아니다.
그들의 사랑은 가장 인간다운 태도인 능동적이고 상호적인 환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종두와 공주는 서로를 전과자나 장애인이라는 조건으로 보지 않고, 그 모든 이름표를 넘어선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마주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내 세계가 흔들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종두와 공주는 바로 그 흔들림을 피하지 않았다. 서툴고 미숙했지만,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사람다워지는’ 길을 배워갔다.

세상은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세상이 미처 열어주지 못한 문을 만들어주었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열어준 따뜻한 문, 두 사람만의 작은 세계. 세상의 잣대와 무관한 순수하고 치열한 생존의 공간.

우리는 그 문을 이렇게 부른다.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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