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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걷는여자 Jun 05. 2020

영화『디아워스(The Hours, 2003)

삶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어요

  2002년 3월의 어느 하루, 누구나 겪었을 평범한 아침이었다. 주방에는 고소한 냄새가 났고, 식탁에는 아삭하고 노릇한 엄마표 호박전이 놓여있었다. 세 식구는 단란한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키스 후 각자의 일상을 위해 흩어졌다. 그날은 내가 대학생으로서 첫 수업을 받으러 간 날로 아껴두었던 구름 빛 스웨터를 입었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설렘과 기대로 캠퍼스를 누볐고, 마지막 일정으로 푸른 눈의 원어민 교수에게 수업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평온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수업 중 계속 진동을 울리던 뜻밖의 전화... 그림자도, 발자국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진 어머니... ‘넌 알고 있었느냐’는 아버지의 물음... 창문 너머로 햇살은 쏟아졌고, 갑작스런 슬픔은 감출 길 없어, 고개를 처박고 책상만 뚫어져라 보았다. 아이보리 빛깔의 공간, 초초하게 울리던 휴대폰, 아버지의 전화, 호기심어린 옆 사람의 눈빛, 당혹감, 두려움, 어쩌지 못하는 슬픔, 버림받은 기분, 일그러진 표정, 절망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심장 박동, 그 순간들(The Hours) 이후 내가 발 딛고 있던 익숙한 세계는 붕괴되었다.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세 식구의 마지막, 유품처럼 남겨진 엄마의 책장과 진주 귀고리 한 쌍, 기척도 없이 사라진 나만의 달, 엄마의 부재는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밤처럼 캄캄했다.

 영화 『디아워스(The Hours, 2003)』는 1923년, 1951년, 2001년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하루의 순간들'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삶과 죽음, 정상과 비정상, 남성적 가치와 여성적 가치 등 서로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어떻게 삶에 공존하고 있는가에 천착한 작품이다.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 하려면 우선 모티브가 되는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와 그녀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모더니즘의 기수이며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20세기 전반의 영문학사에서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저명한 철학자이며 《영국 인명사전》의 편자인 레슬리 스티븐의 딸로 태어나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다.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상류사회에서는 여성들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전통적 가치관의 한계에 늘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울프는 열세 살이던 해에 정서적으로 가장 큰 지지자가 되어주던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정신 질환을 앓게 된다. 이후 언니와 아버지 등 사랑하는 사람들의 잇따른 죽음이 가져다 준 충격과 예민한 기질로 인해 여러 차례의 신경쇠약과 환청으로 고통 받게 된다. 결국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우즈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그녀는 소설을 쓰기 훨씬 전부터 서평과 비평적 에세이를 통하여 자신을 ‘모던’으로 정의하며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과는 다른 형태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낸 작품이었다. 틀에 박힌 인물 묘사와 주체의 고정된 시점을 거부하고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인물, 사건, 배경을 논리적 사슬로 설명하는 방식이 아닌 등장인물의 내적독백을 통하여 마음속 느낌이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마치 모네의 해돋이 그림처럼 외부에서 받은 찰나의 인상들이 감각, 기억, 생각과 뒤섞여 일관성 없이 유동하는 의식을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야기는 중년의 상류층 부인 클라리사 댈러웨이가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아침에 꽃을 사러 런던 거리를 나서는 것으로 시작해 그날 밤 파티의 한가운데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여자의 일생을 단 하루를 통해 보여주려 의도했고 ‘파티’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교차하고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923년 버지니아 울프는 진행 중인 장편 《댈러웨이 부인Mrs Dalloway》을 《순간들The Hours》로 가칭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1923년 영국 리치몬드 교외의 어느 하루. 버지니아 울프는 집필 중인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신경쇠약 증상을 가진 버지니아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 레나드의 보호를 받으며 언니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저녁 식사 시간을 앞둔 그녀는 교외의 질식할 것 같은 마취제 속이 아니라 런던의 거친 삶을 갈구하며 무작정 집을 뛰쳐나가 런던행 기차역으로 간다.

"난 어둠 속에서 혼자 고통 받아요. 깊은 어둠. 내 상태가 어떤지는 나만 알아요."

말도 없이 사라진 버지니아를 찾아 기차역으로 쫓아온 남편의 다그침에 그녀가 한 말이다.


  1951년 미국 LA의 어느 하루.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빠져있는 로라. 둘째를 임신한 그녀의 아침은 평온하다. 남편은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일날 아침을 손수 차린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남편의 출근길에 인사를 하고, 만삭의 몸으로 세 살 난 아들 리차드와 함께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굽는다. 파티 준비 중 이웃의 방문, 키티는 자궁 근종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의식하며 흐느끼고 로라는 그녀를 위로해준다. 이후 갑자기 질식할 것 같은 염증을 느낀 로라는 아들을 맡겨놓은 채 무작정 집을 나선다. 호텔방에 누워 자살을 계획하던 그녀. 그러나 다시 부랴부랴 남편과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가정으로 돌아와 케이크를 완성한다. (둘째를 낳은 후엔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떠나겠다고 다짐하면서.)


  2001년 미국 뉴욕의 어느 하루.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출판 편집자인 클라리사. 그녀는 오늘 옛 애인 리차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엄마 로라에 대한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리차드는 에이즈로 죽어가고 있으며 심각한 신경쇠약을 보인다. 영화의 ‘리차드’는 원작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셉티머스와 가장 닮아 있다. 셉티머스는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전쟁 후유증으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는 인물로, 댈러웨이 부인의 분신(Double)으로 ‘죽음’을 구현한다.

꽃도 사고 음식도 준비하고 파티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클라리사는 리차드를 데리러 간다. 그러나 리차드는 클라리사가 보는 눈 앞에서 5층 창 밖으로 뛰어내린다. 클라리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리차드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삶을 간절히 원했다.


“꼭 누가 죽어야만 하나?”

“누가 죽어야만 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죠...시인이 죽어요. 선지자요.”

(영화 中, 버지니아 울프와 남편 레나드의 대화 장면)


  영화『디아워스(The Hours)』는 삶과 죽음은 매순간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마치 양각과 음각처럼, 죽음을 통해 삶이 부각되고, 삶을 통해 죽음이 부각된다. 매순간 우리는 삶을 선택할지, 죽음을 선택할지,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에 놓이게 된다. 때론 죽음마저도 최선이 되기도 한다. 리차드의 장례를 치른 그 날 밤,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노년이 된 리차드의 엄마-로라 여사이다. 로라는 어린 두 아이를 두고 도망치듯 가정을 떠나버린 것을 후회 했다고 말한다. 동시에 "죽음 속에서 난 삶을 선택했어요."라고 말한다.


  2020년, 로라의 말을 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이후, 누구나 겪었을 평범한 아침은 특별한 나만의 것이 되어있었다. 그 순간들, 엄마의 부재 이후 우울과 죽음은 20대의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절름발이가 된 마음을 돌보는 대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기 바빴다.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던 어느 하루,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 년 만에 나타난 엄마의 모습은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고 왜 그렇게 떠났냐고 차마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하상가에서 떡볶이를 먹고 싸구려 액세서리를 구경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풀지 못한 의문은 원망이 되었고, 알게 모르게 엄마에게 늘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느 하루, 엄마와 심한 말다툼 끝에 “그때 버린 딸년 이제 죽었다고 생각해!”라며 모진 말을 쏟아내던 나, 엄마는 “인연 끊자”는 말 대신 바로 사과를 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단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었음을.


  “죽음 속에서 난 삶을 선택 했던 거야. 정말 미안해."라고 엄마는 말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죽음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는 것처럼, 삶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는 다는 것을.



**인문 매거진 2020, 봄호 《바닥》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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