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苦痛 그 자체에 대한 성찰
필립 얀시&폴 브랜드<고통이라는 선물>
苦자는 艹(풀 초)자와 古(옛 고)자가 결합한 형성문자이다. 매우 쓴 풀(艸)을 맛보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겠다. 풀의 ‘쓴 맛’은 직접 먹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는 것처럼 괴로움은 그 입장이 되어 경험해보기 전까진 결코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痛자는 疒(병들 녁)자와 甬(길 용)자가 결합되어 ‘아프다’, ‘슬프다’, ‘괴롭다’라는 뜻을 지닌다. 甬자는 고리가 달린 종을 상형화한 것인데, 종소리가 멀리 울려 퍼지듯이 온몸으로 고통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苦痛, 손톱 밑의 가시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존재 전체를 전율케 한다. 동시에 내 몸 밖의 타인은 그 고통의 너비와 깊이를 똑같이 경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고통의 강도가 클수록 우리는 더욱 쓸쓸해진다.
이러한 고통의 속성 때문일까, 나에게 고통은 그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삶의 장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었다. 나병 환자를 돕기 위해 일평생을 바친 폴 브랜드 박사의 체험과 성찰을 접하기 전 까진 말이다.
나병(한센병)은 편견과 달리 유전병이 아닐 뿐더러 전염성이 매우 낮은 질병 중 하나라고 한다. 일차적으로 특정 박테리아균에 의해 신경이 손상되는 질병으로 나균은 이마나 코 같은 시원한 곳에서 번성하여 대개 외관상의 손상을 일으키는데, 정말로 파괴적인 증상은 피부 표면 근처의 신경에 침입한 나균이 운동 신경과 감각 섬유에 이상반응을 일으켜 손, 발, 눈꺼풀 등의 마비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부위에 더 이상 촉감, 온도, 통증 따위를 느끼지 못하는 환자는 쉽게 상처를 입고 종종 2차 감염에 노출된다고 한다. 즉, 나병자체가 살을 썩고 문드러지게 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들이 그 부위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신체가 훼손된다는 것이다.
“내 환자들은 나병이 많이 진행되었을 때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뜨거운 난로를 만지거나 못을 밟는다 해도 뇌까지 전달되는 부정적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괴로워했다. 그들은 고통이 주는 자유를 잃어버렸다. 촉감뿐 아니라 때로는 시력도 잃어버렸고 육체적 매력도 잃어버렸다. 질병이 남긴 흔적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느낌마저 잃어버렸다. 마음은 이런 무고통의 결과들에 대해 단지 괴로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감정으로 반응했다.”(p.327)
질병이 남긴 흔적은 나환자들에게 사회적 낙인이 된다. 천형天刑을 받은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오명汚名을 뒤집어 쓴 채 오해와 혐오의 대상으로서 간주되어왔다. ‘인간 사회’로 부터 타자화 되어 집단 거주지에 격리되어 생활하게 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소록도처럼 말이다. 고통이 주는 자유를 잃어버린 나환자들은, 육신과 영혼에 상처를 입은 채 소외가 주는 괴로움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고통보다 더한 질곡은 ‘무감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통은 자아라고 하는 일종의 경계를 제공하면서 그 사촌격인 촉감과 더불어 몸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다. 따라서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경계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환자들이 이제 더 이상 손과 발을 자아의 일부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그들에게는 고통이 정상적으로 제공하는 기본적인 자기 보호 본능이 결여되어 있다.”(p.172)
자아가 감각을 통해 몸의 경계를 감지한다면, 마음의 경계는 감성을 통한 것이다. 몸의 고통이 개인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고독의 경계’라면, 마음의 고통은 타인과 연결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연대의 경계’이다. 공감(empathy)은 그리스어 em-patheia에 어원을 두고 있으며 in-feeling이라는 뜻을 지닌다.
즉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그의 처지가 되어 그의 관점과 감정에 ‘들어가 느껴보는 것’이다. 우리는 공감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수 있으며 ‘연대의 경계’가 확장 될수록 자아는 성장하게 된다.
나환자들이 더 이상 손과 발을 자아의 일부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자아로 가득한 사회는 그만큼 병들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나’라는 개인에 갇혀 ‘우리’를 잃어버린 이기주의와 무관심, 물질의 쾌락에 취해 성찰도 사유도 없는 무감각으로 우리 사회는 병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까? 이성복 시인은 <그날>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위험을 알리는 적극적인 신호이자, 개별적 고통에서 ‘보편’을 배울 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공감’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치유의 시작은 무감각을 넘어 고통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릴 때이다. 병든 우리를 회복하는 길은, 먼저 자아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는 일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인문매거진 《바닥》_2020여름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