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작하며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여러 다짐들을 하거나 새로운 계획을 세울 것이다. 나 또한 책 <나를 살리는 말들>을 만나기 전에는 새해를 기점으로 무엇을 더 할까를 생각하곤 했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무얼 뺄까"를 먼저 결정하기로 했다.
이서원 지음, <나를 살리는 말들>
상담실 벽 책꽂이의 두꺼운 법전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산님을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쭈뼛거리며 나온 산님에게 '앞으로 나란히'를 한번 해줄 수 있냐고 했다. 의아해하며 앞으로 나란히를 한 산님의 양팔 위로 법전 한 권을 얹으며 말했다. "이건 치매에 걸린 어머니예요." 산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한 권을 더 얹으며 말했다. "이건 지금 같이 사는 애들 둘이에요." 세 번째 법전을 얹으며 이건 정신병 앓는 아들, 네 번째는 사고치는 아들, 다섯 번째는 의심하는 아내. 산님의 양팔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거우시죠?" "예!" "뭘 빼실래요?" "뺄 게 없습니다." "그럼 계속 들고 계실래요?" "무겁습니다!" "뭘 빼실래요?" "뺄 게 없습니다!" "그럼 계속 들고 계세요." 산님의 팔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법전들이 바닥으로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졌다. 산님도 무너졌다. 콧물이 범벅되어 울기 시작했다. "뺄 게 없다고요." 그는 통곡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14~15p
지은이 이서원 소장(한국분노관리연구소)은 20년 넘게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상담전문가로서 가정폭력으로 집단상담에 참여한 ‘산님’을 만났다. 산님은 세 번의 결혼 중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자식이 둘이었는데, 한 명은 사고를 치며 경찰서를 수시로 들락거렸고, 한 명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전처는 몰라도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던 산님은 세 번째 아내 몰래 아들 둘의 사고 뒤치다거리와 병원비를 대고 있었던 게 들통나 큰 싸움을 하던 중 살림을 부시다 아내가 가정폭력으로 신고하여 집단상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산님은 공사현장에서 반장을 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가장이자 치매어머니를 모시는 장남으로서 의무와 책임만 있는 삶의 무게로 몸도 마음도 휘청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산님은 '법전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진 이후' 사고치는 아들을 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만한 짐을 져야 몸이 상하지 않는다. 마음의 짐도 마찬가지다.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짐은 몸과 마음의 깊은 병이 된다. 낙타처럼 등이 굽어지도록 가족의 짐을 스스로 짊어졌던 산님은 이제 스스로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무얼 빼실래요?"의 화두를 던져준 산님의 이야기를 통해 두 발로 똑바로 서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인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살리는 말들>은 이처럼 다양한 화두를 통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마음과 마음 사이의 관계를 솔솔솔 풀어줄 실마리를 던져준다. 상담전문가로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살려내며 건져 올린 생명력 펄떡이는 지혜로 타성에 갇혀 고여 있던 마음에 생기를 부여한다.
저자는 지옥과 천당을 결정하는 건 관계의 질이며, 사람이 나빠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지낼 수 있는 이치와 방법을 몰라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자존감이 낮은 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기 때문이다. 가까이의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이유는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이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방법이 서툴기 때문에 고생하고 스스로와 서로를 오해한다.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고 벼랑에 떨어진 듯 참담할 때 유일하게 힘이 되는 건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다. 어릴 때는 부모 형제, 결혼해서는 배우자다. 그럴 때 내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고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날 탓한다면 남은 힘마저 빠진다. - 152p
'사람을 죽이고 나서 살릴 수는 없다'는 묵직한 울림이 책장을 덮은 마음에 동심원을 그린다. 솜사탕 녹듯 달달한 말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펴들었다면 당황할지도 모른다. 다만 자유, 외로움, 책임, 굴레, 관계, 사랑을 되돌아보고 한층 더 밝아진 눈과 조금 더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를 살리고, 나아가 서로를 위한 조금 더 나은 한 마디로 우리를 살리는 이치와 방법을 깨닫게 하는 책 <나를 살리는 말들>을 새해의 당신과 함께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