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줄이지 않아도 되는 사랑을 하고 싶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안아주기로 했다

by 율리

누군가의 깨진 마음을 알아주는 일은, 사실 내 안의 부서진 구석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용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려 애쓰는 순간, 사랑은 상대를 살리는 일을 넘어 불완전한 나로서도 계속 ‘나’일 수 있게 만드는 단단한 생존법이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 상처는 치유되지 못한 채 깊은 흉터가 되고야 맙니다. 그 순간 멈춰버린 시간은 어른이 된 후에도 문득문득 찾아와,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는 하지요.


실은 나도 내 말과 행동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곤 했던 겁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매번 제자리걸음인 나를 보며 괴로워했습니다.


사랑하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가가고 싶어지니까요. 그때 우리가 떠올리는 그 모습은 사실, 상처가 치유되었을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될 ‘진짜 나’의 청사진이기도 합니다.


그런 나로 살아가고 싶다면,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연습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립된 섬이 아니에요. 내가 어떤 공동체에 머무느냐가 곧 나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경직된 조직은 나를 굳게 만들고, 유연한 사람들 곁에서는 나 또한 부드럽게 물듭니다.


그러니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이미 실현된 곳, 이미 그 모습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곁에 나를 데려다 놓으세요. 그들과 온기를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곧 내 상처를 치유하는 다정한 방식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내가 꿈꾸던 모습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이해할 안목이 자라납니다. 그때 질문이 달라질 수 있어요.


“도대체 난 왜 그랬을까”라는 자책이 “왜 난 그럴 수 밖에 없었을까”라는 자기 이해로 바뀝니다. 나라는 인간의 필연적인 한계를 이해하고 나서야, 타인이 짊어진 고통 뒤에 숨겨진 피치 못할 사정들도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내 안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애써 본 사람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섣부른 판단을 멈출 줄 압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대를 내 방식대로 고치는 일이 아니라, 그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먼저 묻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과정에 가까워요.


권력과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은 사랑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사랑한다면서도 이해가 빠져나간다면 그 자리에는 압력이 남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상대가 원하는 모습의 ‘나’여야 사랑받을 수 있다는 조건부 사랑,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갑니다. 사랑받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 할테니까요.


사랑은 때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는 왜곡될 수 없어요. 왜곡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이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있는 그대로 알아봐 주는 것만이 나를 나답게 숨 쉬게 합니다.


오웰이 묘사한 인공 언어 ‘신어’가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했듯, “네가 이래야만 사랑해”라는 좁은 언어 속에 맞춰 나를 작게 줄인 사랑은, 내 존재를 깎아내고 점점 옅어지게 만듭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충돌할 때, 우리는 흔히 나 자신을 깎아내는 쪽을 택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를 잃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사랑하는 길은, 역설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의 깨진 마음을 알아주는 일은, 사실 내 안의 부서진 구석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용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려 애쓰는 순간, 사랑은 상대를 살리는 일을 넘어 불완전한 나로서도 계속 ‘나’일 수 있게 만드는 단단한 생존법이 됩니다.


결국 사랑은 상대를 구원하는 일인 동시에, 나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지켜내는 가장 다정한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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