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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May 15. 2020

서러운 밤을 갉아먹고

에세이 -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엄마 냄새에 대한*

다가올 프로젝트를 위해 창작집단 담 멤버들이 매주 모이고 있다.

우리는 훈련을 위해 서로를 대상으로 '미니 인터뷰'를 진행했고 나는 노만추의 인터뷰이가 되었다.

노만추는 '1인 가정의 삶'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 왔고. 10년 넘게 1인 가구인 나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덕분에 지난날들을, 밤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떠올랐다. 그 많던 서럽던 밤들이.


처음으로 혼자 자던 날 밤이 기억난다.

이사를 도와주신 부모님이 본가로 내려가시고 혼자 산다는 설렘이 좀 가실 때쯤, 온 통 조용한 밤이 내려앉았다. 내 숨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작은 방. 괜히 이것저것 움직이며 소음을 만들어도 보고 조그만 오디오에 밤새도록 음악을 틀어두기로 했었다.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들리는 작은 방이 참 컸다. 문과 창문이 다 닫힌 이 방안에 뛰는 심장이라곤 내 것 하나뿐이라는 게 정말 낯설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밤이 내가 혼자 살면서 울게 될 수많은 밤 중 첫 밤이었다.


하긴, 10년 넘게 혼자 살면서 서럽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기억도 못할 만큼의 밤들이 겨우겨우 지나갔을 테지. 그런데 그게 뭐 나 혼자만 가진 대단한 역사도 아니고 실패, 이별, 사람 등등의 이야기는 겸연쩍으니 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지난봄 너무 아팠던 그 밤 이야기는 좀 해야겠다.


많이 아팠다. 코로나 19 덕분에 공연이 취소되었고, 쉴틈 없이 움직이던 몸을 잠깐 방치했더니 아프기 시작했다. 탈이 났던 것 같다. 그때 그 석화를 먹지 말았어야 하는데. 아무튼, 온몸이 욱신거리고 배가 아팠다. 두통도 있었고 계속 열이 났다. 화장실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지만 탈수는 안된다는 생각에 물을 계속 마셨는데, 엄청난 양의 물을 먹었는데도 소변을 별로 보지 않을 정도로 땀이 많이 났다. 이불속에서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달달달 떨었다. '와, 정말 오랜만에 지독하게 아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아팠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아지길 기다릴 뿐이었다.


"별일 없나?"라는 엄마의 문자에 깼다. "그럼요! 잘 있어요. 밥 먹고 컴퓨터 하고 있어요!"라고 답장을 했다. 시간을 보니 늦은 저녁이었다. "왜 밥을 그래 늦게 먹었냐"라는 엄마께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늦었슈~" 하고 곧 다시 "조금 늦게 자면 되지 모~" 했다. "일찍 자라."라는 엄마의 마지막 문자. "네~"라는 나의 대답.


잠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어제보다, 그 전날보다 조금 더 나아진 것 같았다. 이제 좀 나으려나 보다 했다. 어제, 겨우 걸어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빈속에 챙겨 먹었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머리도 안 아프고 몸이 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이제 됐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겠다.' 하는 생각에 맘이 놓였다. 이젠 30대라서 회복도 느리구나, 하루면 나았었는데 이제 며칠은 걸리는구나 휴휴. 하며 휴대폰을 들고 SNS나 확인해 볼 생각으로 소파에 훅 하고 앉는데, 어? 익숙한 냄새가 났다. 익숙하다기보다 아련한 냄새라고 할까. 오래전에 자주 맡았던 냄새인데 이게 무슨 냄새였더라. 조금 구수하고, 달큼하기도 한 냄새. 그 냄새를 놓고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의 회색 반팔티. 오래 입어서 보풀이 조금 생긴 그 반팔티. 그 옷에 볼을 부비는 기억. 나를 안아주던 엄마의 품. 엄마의 팔. 엄마의 체온. 맞다! 엄마 냄새였다. 해 질 녘 오렌지빛 하늘 같은 그런 냄새. 구수하고 달큰한 부드러운 엄마 냄새.


아니 그런데, 왜 이 냄새가 나는 거지. 어디서 나는 걸까. 엄마랑 연락을 하고 난 뒤라서 내가 착각을 하는 건가. 아직 덜 나았나. 너무 아파서 머리를 다쳤나? 열이 오르면 뇌세포가 죽기도 하는 건가? 환각인가? 여기저기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 냄새는 나한테서 나는 거였다. 아니, 나에게서 엄마 냄새가 나다니. 내가? 나? 엄마 아닌데. 왜? 지금? 나에게서?


입고 있던 옷을 펄럭이며 냄새를 찾다가 깨달았다. 그건 식은땀냄새였다. 지난 며칠간 끙끙 앓는 동안 흐르고 마른 땀이 만든 냄새. 씻을 틈도 없이 흘린 땀이 옷을 적셨다 마른 냄새였다. 이 냄새가 엄마의 냄새라니.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냄새가 식은땀 냄새였다니. 두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을 하느라 제대로 쉴 틈도 없었던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났던 땀 냄새. 그게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냄새였다.


엄마 냄새가 나는, 배탈이 난, 며칠 씻지 않은 혼자 사는 여성은 그날 밤 많이 울었다. 그 며칠 아프면서 좀 서러웠나 보다. 어른처럼 버텨내고 있었는데 쉽지 않았나 보다. 익숙해진 줄 알았던 혼자살이와 어른의 삶이 문득 서러웠나 보다. 하나도 익숙하지 않았고 밤이 너무 길었고 같이 이야기할 누군가가 필요한 밤이었나 보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서러운 밤이다. 그리고 아팠던 몸은 다음날 말끔하게 나았다.


예전에 일기장에 이런 말을 썼었다. "이 서러운 밤을 갉아먹으며 나는 살고 있다." 마주치면 서러운 그 많은 밤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찬찬히 다 갉아먹어야지. 내버려 두면 너무 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그 밤들을 내 맘을 채우는 데에 쓸 생각이다. 이렇게 엄마의 냄새를 글로 풀어내듯. 서러운 밤을 갉아먹고 나를 살 찌워야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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