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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만추 May 18. 2020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감훈련

위로는 빨간 옷을 아래로는 하얀 옷을 입은 버스가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나는 왼쪽 어깨에 메고 있는 검정 가방 안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까슬까슬하면서도 집었을 때 모양이 바뀌지 않는 물건을 찾았다. 생수병 크기만 했던 버스가 점점 커질수록 오른 손가락이 가방 속 물건들을 훑고 지나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알약 껍질을 밀어 올리듯 왼손으로 가방 밑단을 밀어 올렸다. 지갑을 꺼내자 토끼처럼 달리던 버스가 거북이처럼 기기 시작했다.      


버스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창문으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버스에서, 오랫동안 물속에서 참았던 숨을 물 위로 올라와 뱉어내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버스로 올라가 지갑을 카드리더기에 대며 내가 설 자리를 찾았다. 통로에 서 있던 사람들이 게처럼 걸음을 옮겨 뒤쪽으로 향했다. 이미 지나온 카드리더기에서 띡- 그리고 띡-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앞선 사람을 따라 통로를 걸었다.     


갑자기 통로가 좁아졌다. 한 사람이 발을 옮겨서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버스 좌석에 최대한 몸을 붙여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오른손으로는 버스 좌석에 붙어있는 손잡이를 잡고, 왼손으로는 등받이에 덮여있는 하얀 천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왼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품에 안고 그 사람의 등을 지났다. 마치 중학생 때 영어캠프에서 처음 접했던 트위스터 게임을 하는 듯했다. 그 사람의 앞에는 근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정류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아까 보았던 남학생이 몸을 일으켜 천장에 붙어있는 벨을 눌렀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카드리더기는 남학생을 배웅하고 새로 타는 사람들을 반겼다. 띡- 띡-. 나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한번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왼발을 반 발자국 뗐을 뿐인데 옆에 선 여자의 운동화와 부딪혔다. “뒤로 좀 들어가 주세요. 이러면 못 갑니다.” 버스 기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쪽을 향해 소리쳤다.     


청소기로 바람을 흡입하자 쪼그라드는 이불 압축팩처럼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버스 뒤편으로 쪼그라져 포개졌다. “다음 버스 타세요. 다음 버스. 10분 뒤에 와요.” 이번엔 기사님이 밖을 향해 외쳤다. 삐-하고 버스 문이 닫힌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그러나 문은 무언가에 걸린 듯 닫히다가 다시 열렸다. 한 번 더 문이 닫힌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그때, 출입문 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더니 맨 앞자리에 있는 쇠로 된 봉을 잡았다. 그리고는 손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상체가 봉을 잡은 손보다 높이 올라왔다. 버스 문과 버스가 맞닿는 소리가 나자 봉을 잡은 사람의 상체는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다시 또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고 옆 사람의 발을 밟을까 봐 좌석에 붙은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에 앉은 사람은 머리를 창문에 대고 자고 있었다. 허리를 돌려 반대쪽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봤다. 한 명은 역시나 자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나는 허리뿐만 아니라 발의 방향까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사람 쪽으로 돌렸다. 버스가 급정차했을 때, 봉지를 기울이면 쏟아져 나오는 ‘비틀즈’ 사탕처럼 되지 않기 위해 좌석에 붙은 손잡이를 붙잡고 남은 손으로는 등받이에 덮여있는 흰색 천을 잡았다.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사람이 핸드폰에서 눈을 떼더니 엉덩이를 살짝 들어 고개를 기웃거리며 버스 앞쪽을 보고자 했다. 그러더니 보고 있던 영상을 끄고,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역을 알리는 버스 안내 방송이 들렸다. 이어폰을 가방에 넣은 그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에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손잡이를 잡은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그를 기억하고자 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봤다.     


뒤쪽에서 백팩을 든 누군가가 종이접기 하듯 이리저리 몸을 구기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등을 활처럼 꺾어서 그가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가 나를 지나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반대쪽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혹시나 잠에서 깨진 않았는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했다. 내 기대와는 달리 두 사람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 창가 쪽에 앉은 사람에게서 코 고는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나는 긴 한숨을 쉬고는 발을 어깨너비로 벌렸다. 그리고는 좌석 등받이 쪽에 몸을 3분의 1 정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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