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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May 10. 2021

[이 시국에 장막희곡] 너의 지난 삶을 좀 보여줘라!

요롱박의 장막희곡 5

2021년. 4월 16일. 월요일. 

진행상황 - 1페이지... 정말?


  나는 요즘, 클레어의 프로필 그리고 인물의 라이프 스토리를 만들고 있다. 희곡에 쓰이기 전까지의 이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는 것이다. 정답은 없다. 꼭 지켜야 하는 어떤 법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단 한 가지, 이 인물의 삶이 희곡에 나올 사건에 분명 영향을 미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것. 정말 어디부터 딛어야 하는 걸음인지 알 수가 없다. 진짜 소-설 쓰고 앉았다. 정말 시-나리오 쓰고 있는 중이다. 이 인물의 삶에는 어떻게든 나의 삶이 자꾸 묻는다. 그게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이번 글은 아주 구구절절할 예정이다. 아마 다음 주 까지 그럴 예정이다. 



간략한 프로필


클레어 

한국 이름 : 정안진 (편안 안, 보배 진)

생년월일 : 1975년 6월 16일 (2021년 현재 47세)

주거지 : 유동인구가 많은 대학가 빌라촌의 오래된 오피스텔

특징 :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한다. 눈을 감거나 손으로 눈을 가리고 다닌다. 



인물의 라이프스토리


0세~10세 

  클레어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인문학 교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 두 사람은 사랑으로 아이를 길렀고 부족함 없는 유년기를 보낸다. 유치원, 사립 국민학교를 다녔고 5살이 되었을 때 동생 정소진이 태어난다. 클레어는 어렸을 때부터 영특했다. 공부도 곧잘 했고 교유관계도 나쁘지 않았으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사고도 치지 않는 성격의 차분한 아이. 부모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이. 


10세~20세 

  12세 초등학교 5학년 때 부모님과 함께 유럽 일주 여행을 다녀온다. 클레어는 서울과 너무 다른 유럽의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자신의 몸보다 큰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들을 본 기억을 잊지 못한다. 한국에 돌아와 소피 마르소 주연의 영화 '라붐'을 보게 되고 그 후 쭉 프랑스를 동경하게 된다. 국민학교를 문제없이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클레어는 자신이 프랑스 사람이 되길 바란다.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가느라 조금씩 달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 클레어는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샹송을 찾아 듣고, 프랑스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서 본다. 고등학생이 된 클레어는 불어를 공부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간단한 일상어 몇 마디는 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학용품에는 '정안진'이라는 이름 대신 'clair'라는 이름이 써진다. 

  동생 소진과는 나이 차이가 있어서 많이 친하진 않았다. 자매지만 너무 다른 성격이었다. 안진은 스스로 자신을 챙기고 손이 별로 가지 않는 학생이었지만 소진은 그렇지 않았다. 소진은 부모님의 사랑을 늘 원하는 아이였다. 클레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에 동생 소진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클레어는 소진이 유치하고 어리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늘 소진을 잘 챙겼기에 클레어는 동생을 돌볼 필요가 없었다. 더욱 학업에 열중했고 소진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겼다. 

  클레어는 고등학교 내내 열심히 공부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부모님께 그림을 전공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부모님은 늘 그랬듯 클레어의 뜻을 존중해 주었고 2년간의 입시 끝에 명문대 회화과에 입학할 수 있게 된다. 


20세~24세 

  클레어는 대학에 가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유지한다. 부모님은 대학 근처에 클레어의 자취방을 얻어준다. 보통의 학생들이 영유하기에는 조금 넘치는 방 2개짜리 오피스텔을 구해준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생활비를 늘 보내주셨고 학비도 학자금 대출 없이 부모님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클레어는 집의 방 하나를 아뜰리에로 꾸미고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 '현'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클레어는 '현'을 프랑스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유연해 보이는 '현'과 자주 만났고 덕분에 재밌는 학교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파리지앵이라고 불렀다. 이는 과에 소문이 나서 후배들도 두 사람을 '파리지앵 선배들'이라고 불렀다. '현'은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했다. 패션에 관심이 없었던 클레어 역시 점점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공부하고 그림만 그리면 되는 삶을 사는 클레어는 대학에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다. 졸업작품은 회화 작품에 다양한 소재의 천을 붙여 만든 콜라주 작품이었다. 

  연애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국에는 진정한 로맨스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2학년 때 부모님과 크게 싸운 일이 있다. 프랑스로 혼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혼자서는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하셨고 사촌 오빠와 함께 가라고 했지만 클레어는 거절한다. 이를 계기로 원래도 크게 가깝지 않았던 부모님 과의 사이가 한 층 더 서먹해졌다. 클레어는 유학을 준비한다. 미대 분위기상 유학을 가는 학생이 없진 않았지만, 유학을 가는 여학생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클레어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더욱 학교 생활과 작업 활동에 몰두한다. 부모님들은 클레어가 늘 혼자서 잘해 오던 딸이라 멀어진 사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학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 고등학생 소진에게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24세~29세 

  대학을 졸업한 해 가을. 클레어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반대가 좀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클레어를 믿어주기로 하셨다. 대학 4년 동안 걱정할 일 없이 우수하게 학업을 마친 것도 믿음의 근거가 되었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후 취직을 하고 몇 년 후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클레어의 꿈을 이루길 진심으로 바랬고 뭐든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프랑스 파리로 떠난 클레어는 어학연수 이후 대학원에 입학한다. 첫 1년 적응기간은 프랑스에 와 있던 아버지 제자의 도움으로 어려울 것 없이 지나간다. 각 종 비자, 서류, 은행계좌 등과 같은 것들을 모두 해결해 주어 클레어는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어학연수 생활 동안 같은 학원의 한국인 남자가 클레어에게 절실한 사랑의 마음을 품는다. 하지만 클레어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자신의 로맨스는 한국인과 나눌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남자를 만나 프랑스에서 프랑스의 로맨스를 경험하길 바랬다. 

  애정과 열정, 그리고 클레어가 갖고 있던 프랑스에 대한 환상은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었다. 패션스쿨에 입학한 클레어는 회화를 전공한 자신만의 감각으로 좋은 작업을 이어가고 동양인의 소수성을 과감하게 드러낸 작업물로 좋은 평가를 얻기도 한다. 졸업하면 프랑스에서 직장을 구해 이 곳에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 


29세~33세 

  대학원을 졸업하기 전부터 관심을 갖던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하게 된다. 1년간의 인턴이 끝나면 정직원이 될 것이라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클레어는 30세에 인턴을 그만두며 '무직'이 된다. 학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닌. 클레어는 6살 유치원에 입학한 순간 이후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30세의 클레어는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속할 가족도 없는 파리, 속할 공동체도 없는 동양인이 되어 오롯이 혼자가 되어 버린 클레어는 어디에든 속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쉽지 않다. 

  유학생활 내내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으로 살아왔기에 굳이 일자리를 구하려 애쓰지 않았다. 매달 들어오는 생활비로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다. 프랑스의 곳곳을 다녔으나 '이방인'인 자신의 존재만을 확인한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랑에 빠지게 된 남자는 대학원 강사였던 프랑스 남자. 그는 클레어에게 동양인 여자에 대한 환상을 요구했고 클레어는 처음엔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그에게 끌려다니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이별통보를 받는다. 클레어는 그와의 만남을 영화처럼 기억한다. 하지만 사실은 폭력적인 관계였다. 클레어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클레어가 파리에 있는 동안 아버지는 정년퇴임을 하신다. 클레어는 더 이상 예전만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학교도 직장도 없는 클레어의 비자가 만기 되었지만 이를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행을 마친 클레어는 파리의 광장에 자리를 펴고 앉는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전공이 아닌 일로 돈을 벌기는 싫었다. 초밥집에서 서빙해서 돈을 벌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손은 그림을 그리고 옷을 디자인하는 손이어야 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파리의 풍경 속 일부가 되길 원했다. 관광객들의 초상화와 파리의 풍경을 담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클레어는 그렇게 거리의 사람이 되었다. 

  파리의 길 위에는 많은 이들이 살았지만, 여자 혼자는 드물었다. 동양인 여자는 더욱 그랬다. 거리의 집시들에게 그림 그린 돈을 다 빼앗기고 얻어 맞았던 날. 클레어를 유심히 봐 오던 광장 근처의 카페 주인이 클레어의 사정을 알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클레어는 파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그녀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카페 주인은 클레어의 학교를 통해 학생 시절 지인을 찾게 되고 그와 함께 그녀를 설득하여 한국으로 돌려보낸다. 한국으로 돌아가던 비행기 안에서 클레어는, 파리로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쓰다 보니 더, 더, 그리게 된다. 고작 몇 번의 두드림으로 쓰인 '클레어'라는 이름에 아주 미세하지만 도톰하게 살이 붙는 기분이다. 아주 연한 선이 그어지면서 클레어라는 사람의 얼굴이 보일 것만 같다. 내 희곡 속 클레어는 47살이다. 아직 14년의 삶이 더 남았다. 그리고 이 14년이 지난 33년 보다 더 무거울 것 같다. 

  일주일을 더 보내면서 차분히 클레어를 그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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