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희곡 - 눈에 대한
1. 등장인물
나 : 36세 여자. 6개월된 고양이 한마리와 혼자 살고 있다.
유키 : 6개월된 고양이
제이 : 19살 늙은 고양이
2. 장소
나의 집, 혼자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방 하나, 거실 하나의 집. 화이트 톤에 목재 가구들로 채워진다.
한 쪽에 커튼이 쳐진 창문이 있다.
3. 때
눈이 오던 겨울
4. 이야기
해가 지는 저녁 급하게 '나'가 집으로 들어온다.
나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잘 있었어?
유키가 침대 이불 속에서 움찔한다.
나 일어나. 미안해. 이렇게 늦을 줄 몰랐어. 밥은 먹었어?
유키의 밥그릇을 살펴보지만 밥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나 왜 다 안 먹었어. 배 안 고파?
침대를 바라보지만 유키는 답이 없다.
나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된다.
나 유키?
나가 급하게 침대로 달려가며
나 유키! 일어나! 왜 그래? 괜찮은거지?
나가 급하게 침대로 달려가 이불을 걷어낸다.
유키 (자다가 깜짝 놀라서 깬다) 어? 어! 언니! 언니 왔네! 언니왔어. 왜 이제 왔어. 나 너무 심심했단 말이야. 하루종일 너무 졸려서 나 계속 잠만잤는데 안 자려고 했는데도 언니가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잠이 와서 버티려고 했다? 그런데 언니가 안 오는거야. 밥을 조금 먹었는데도 언니가 안 오고 쥐돌이랑 놀았는데도 언니가 너무 안 와서 내가 쥐돌이를 숨겨 놓으면 언니가 올 줄 알고 여기저기 막 숨겼는데도 언니가 안와서 너무 무서웠는데 근데 졸린거야 그래서 내가 따뜻한 곳으로 가려다가 소파가 좋아보여서 거기서 또 잠깐 잠들었는데 언니가 그래도 안 와서 눈 뜨니까 언니가 없어서 언니 냄새 맡으려고 언니 자는 곳 에 가서 누웠는데 언니 냄새가 나서 그 냄새에 내가 잠이 또 막 오는거야 그래서...
유키는 나에게 온 몸을 기대고 계속해서 품 속으로 파고들며 말한다. 나가 유키를 꼬옥 껴 안는다.
나 그랬구나. 유키 언니 기다렸구나. (유키를 쓰다듬는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오늘 차가 막혔어. 밥은 왜 안 먹었어. 걱정 했잖아. 미안해 언니가 다 미안해.
유키 오늘 잘 지냈어? 맛있는거 잡아 왔어? 나 없이 뭐 했어? 나는 심심했어.
나 알았어. 그래. 그래. (유키 얼굴을 두 손으로 잡는다) 그래서? 오늘도 잠만 잤네?
유키 (얼굴이 잡힌채로) 언니 불편해 놔 주라
나 그래도 언니가 오면 바로 달려 나와서 인사 해줘야지.
유키 (여전히 얼굴이 잡힌채로) 내가 오늘은 빨강색 캔이 먹고 싶은데 그거 주라.
나 다른 집 고양이들 보면 문 앞에서 기다리고 그러던데 임마, 너는 자고 있었다 이거야? 언니 놀라게?
유키 (팔을 휘적거리며) 놔 주라, 놔 주라아
나 알았어, 미안해. 놔 줄게 (유키를 잡았던 손을 놔 준다)
나는 부엌 쪽으로 가서 빨강색 캔을 꺼내 딴다. 유키의 밥그릇을 비우고 캔을 담아 준다.
유키 빨강색~ 빨강색~ 맛있는 빨강~
나 천천히 먹어. 또 허버허버 먹다가 토할라고. 천천히 먹어.
유키 (먹으며) 빨강색~ 빨강색~
나 물도 좀 마시고
유키 (먹으며) 빨강색~ 빨강색~
나가 유키를 지켜보는 동안 반대편에 제이가 등장한다. 밥 그릇을 놓고 바라보고만 있다.
나는 제이를 바라보고 잠시 기다리다, 말을 건다.
제이 안 먹어
나 왜 안 먹어. 밥 좀 먹어.
제이 바보. 안 먹어. 먹기 싫어. 이제 안 먹어.
나 그러지 말고 조금만 먹어봐. 왜 너무 물을 많이 넣었어? 그래서 싫어?
제이 바보. 이제 부터 안 먹어. 안 먹을 거야. 그래야 해.
나 왜 그래. 누나가 화장실도 치우고 니 방도 치우고 캣잎도 여기 조금 뿌렸어 얼른 먹어.
제이 바보
나 조금만 먹어봐.
제이 바보. 바보 인간.
제이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 왜 안 먹어. 제이야. 먹어야지. 먹어야 된단 말이야.
유키 다 먹었다! 야! 언니! 나 다 먹었다. 잘했지? 잘했지? 사실 조금 더 먹을 수 있는데 참을게 더 달라고 해도 안 줄거지? 다 알거든? 알았어 그럼 나 물 먹는다 물 먹을거야. 나 봐. 언니. 나 보라니까. (나를 당기며) 봐봐. 나 물먹는다? (물을 마신다) 잘 먹지? 나 물! 물먹어~ 나 물먹어~
나 (유키를 바라보며) 잘 마시네 우리 유키 잘 마시네.
유키 언니, 나 다 먹었다. 다 먹었어. 이제 방에 가자. 푹신한 곳으로 가자! 가서 내가 숨겨둔 쥐돌이 찾아줘 얼른, 찾아봐 내가 잘 숨겨 뒀단 말이야. 빨리 찾아봐. (나를 당긴다)
나 그래, 알았어 들어가자. 뭐 하고 놀까? 쥐돌이 다 어디갔어? 어디 숨겼어 우리 유키?
유키 (웃으며 겅중겅중 뛴다) 헤헤헤헤! 내가 꽁꽁 숨겼지! 언니가 찾아야 해. 언니가 다 찾아야 해!
유키가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나 언니, 금방 갈게! 너무 뛰지마! 책상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
나는 밥그릇을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본다.
나 눈 오네?
창밖, 까만 밤 하늘에 하얀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잠시
유키가 얼굴에 두루말이 휴지를 감은채 뛰어 나온다.
유키 언니 언니! 이것봐 내가 하얀거 풀었지. 이거 근데 왜 안 풀려... 어?
유키가 창밖을 본다.
유키 저게 뭐야? 뭐가 떨어지네?
나 처음 보지? 저게 눈이라는 거야.
유키 오늘 졸렸는데. 그래서 물이 가득한 날인가? 했는데 그래서 졸렸는데. 아니네. 이게 뭐야?
나 신기하지? 눈이 오는거야. 비 아니고 눈이 오는거야.
나가 창문을 열어 준다. 유키가 조금 놀란다.
유키 으, 추워.
나 춥지? 구경만 해. 눈이라는 거야. 이게.
유키 추운날. 하얀게 떨어져.
나 예쁘지?
유키 와아
잠시 눈을 바라본다. 창문 아래로 제이가 와서 앉는다.
제이 문 닫아. 추워
나 왜 눈 예쁘잖아. 왜 그래 구경하자.
제이 춥잖아. 춥다구.
나 왜에? 잠시만.
제이 바보. 바보인간.
나 오늘 따라 말이 많네. 왜 안 자고 자꾸 잔소리야.
제이 바보. 추운데. 어쩌려고 저래. 문 닫아.
나 제이야.
제이 왜.
나 눈 구경 하러 나갈래?
제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
나 너 어렸을때 눈 오면 나랑 구경 갔었는데. 내가 너 점퍼 안에 껴 안고 나갔었던거 기억해?
제이 감기 걸린다고, 너 침대에서 안 나오고 자꾸 자려고 그래? 문 닫으라고.
나 조용히 좀 해 늦은 밤에 그러면 옆집에서 뭐라 그런다고.
제이 이 바보 인간.
나 이리로 와 봐 잠깐만 봐.
제이 그게 그렇게 좋아?
나 (창밖을 보며) 이렇게 가만히 눈 쌓이는 걸 보고 있으면. 맘이 편안해 진다고.
잠시
제이 그렇게 꼭. 눈이 오면 그렇게 보는구나 인간. 그렇게 한참을 보는구나.
나 눈이 자꾸 쌓여. 조용하게. 너무 좋다.
유키 너무 신기해.
제이가 아주 불편한 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간다.
나 그렇게 좋아?
유키 너무 신기해. 언니, 저 위에서 계속 떨어져. 신기해. 아무 냄새도 안 나. 신기해.
나 그래도 여기서만 봐야해. 밖으로 나가면 큰일난다?
유키 그런데...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몸에 감긴 두루말이 휴지를 인지한다) 엇! 아! 이거! 이거! (창 문 앞에서 빠르게 뛰며 손을 휘적거린다) 이게 자꾸 날 따라와! 내가 조금만 물었는데 막 따라와!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오지마! 저리가! 하얀색! 저리가!
나 잠시도 쉬지를 않는구나.
나는 창밖을 바라본다. 계속해서 눈이 온다. 유키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며 뛰어 다닌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창 밖을 본다. 어느새 창문 밖은 온통 하얗게 변한다.
나 제이야. 눈 와. 눈이 와. 네가 무지개 다리 건너간 후에 오는 첫 눈이야. 이상하게 너는 눈이 오는 날이면 한참을 울고 그러더라. 유키는 안 그래. 그냥 정신 없어.
유키가 또 한번 공간을 뛰어 지나간다.
나 보고싶네. 우리 제이.
유키가 한 쪽 다리에 휴지 상자를 끼운채 엉거추춤 뛰어 들어온다.
유키 언니! 살려줘! 이게 나 물었어! 야, 물지마! 물지 말라고! 언니. 나 살려줘!
나 (유키를 보고) 알았어. 아유 다 부셔라 부셔. 이리와 언니가 풀어줄게.
유키 (방으로 뛰어들어가며) 언니, 쥐돌이 찾아서 얘 줘 나 대신 쥐돌이 먹여! 나 아픈것 같아. 물렸어!
나 유키야! 그러면 안 돼. 이리와.
유키와 나는 방으로 들어간다.
열린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린다.
한 참을 내리는 눈 위로 고양이 발자국이 하나씩 찍힌다. 조용하고 느리게 발자국이 찍힌다.
어느새 한 줄로 이어진 발자국이 남는다.
눈이 내린다.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