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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Mar 09. 2020

대가리병 말기 환자

에세이 - 담에 대한 

담하다 (淡淡--) 

1. 차분하고 평온하다. 2.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이다. 3. 물의 흐름 따위가 그윽하고 평온하다.



이- 상하게도, 나는 중학생때 부터, 또래 사이에서 리더를 맡고 있었다. 각종 부장, 반장, 회장 을 맡았고 그게 좋았다. 매번 내려야 하는 선택들이 내 손에 놓여 있다는게 좋았고 그 선택들이 맞아 떨어지는게 보람찼다. 사람들이 내게 의지하는 것도 좋았고 내가 필요한 사람이 된것 같아서 만족 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내 가치를 인정 받고 싶었던 것 같다.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나 였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일을 하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여기 저기에서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상- 하게도, 점점 내가 내리는 선택들이 무겁게 느껴진다. 실제로 그런건지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의 선택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 조금 오바해서는 그들의 삶에 내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하니 아주 작은 선택에도 손이 덜덜 떨리곤 한다. 자려고 누운 침대에서 벽쪽을 바라보고 한 참을 고민한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 직전까지도 다시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한다. 하지만. 절대로 티를 내선 안된다!


2월 23일 코로나19로 인한 국가 전염병 재난 단계가 '심각'으로 격상했다. 당시 나는 각기 다른 4팀의 창작단체를 모아 공연을 만들고 있었고 전체 공연의 대장이자 우리팀의 작가 겸 연출이었다. 극장 대관과 전체 제작비를 관리하고 있었고 공연 제작은 이미 최종 리허설 단계였다. 사태가 심상찮다고 느껴진 후 부터 선택을 위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이게 맞는걸까?', '너무 성급한 결정은 아닐까?', '그래도 되는 걸까?', '어떤 선택이 가장 좋은 결정일까?' 3일 밤낮을 고민했다. 생각이 비는 시간에는 항상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나는 '공연 취소'를 결정했다. 


나 혼자 내린 결정은 아니었지만 회의 때 "상황이 이러이러 한데, 어떻게 생각해?" 라고 말을 시작했을때 나는 사실 이미 마음 속으로 공연 취소를 결정한 후 였다. 그리고 다행히 전체 제작팀들이 동의해 주었다.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또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 졌다. 내가 내린 (겉으로 보기엔 모두가 함께 한)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버스 안에서 오랫동안 심장 뒷쪽이 얕게 떨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했다. 고작 나라는 인간이?


그 공연 제작에 함께했던 많은 이들이 그 날 이후로 많이 속상해했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담담한척 했다. 다들 화도 내고 괴로워하고 투덜대고 그랬다. 나도 조금 그랬다. 하지만 결국엔 담담한척 했다. 혼자 대-단히 멋있는 사람인양 "괜찮아. 괜찮아 질거야." 라고 했다. 밤새 세상을 탓하고 나를 탓하는 괴로운 일기를 며칠이나 썼지만 그들에겐 그렇게 말 했다. 아직도 그 결정은 나를 괴롭히고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제법 오랫동안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모두와 함께 견딜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거 대가리병이네"

얼마전 친구가 내 병명을 알려줬다. 그렇다. 나는 대가리병에 걸려있다. 불치병이다. 난치병이고 고질병이다. 하는 일에서 리더를 맡아서 선택하길 좋아하는 사람. 그 선택이 모여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을 견디길 좋아하는 사람. 병이 확실하다. 

대가리가 되어 내렸던 모든 선택들이 두려웠고 겁이 났었다. 단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 떨림들을 견디면서 나는 자랐다. 담담한 '척' 했지만 그 덕분에 아주 조금은 진짜 담담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함 앞뒤로 영원히 떨고 있는 내가 있다!!) 


'담'이라는 이름으로 좋아하는 사람들과 글을 쓰기로 했다. 꾸준히 오랫동안 글을 쓰기 위해 만든 방법이다. 여기서는 대가리가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음이 아-주 편하다. '담'을 시작하면서 작은 다짐을 했다. '담담한척 하지 않기' 자고로 다짐이란 잘 안 될 것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어막이긴 하지만 최대한 노력해볼 생각이다. 


두렵고 무섭고 안타깝고 떨리고 설레고 쫄고 모자라고 아쉽고 주관적이고 사사롭고 할 수 있는 오두방정을 다 떨어가면서 차근차근 글을 써 보고 싶다. 담담함으로 만들어 놓은 내 페르소나 뒤에, 꼬리쪽에 좀 밀려있지만 사실은 제법 근사한, 다른 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가리병 말기 환자의 담담한척 벗어던지기 도전! 

'담'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참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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