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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심장은 나대지 않았다

by 글담쌤

막상 받아 든 웅변 원고 책은 아주 낯설고 이상하다. 뭔가를 주장하는 글. 목소리 높여 외치는 글은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독서가 아니다. 이건 선배 언니 같은 웅변가들이 읽는 책 같다. 그러나 트로피에 눈이 먼 나는 웅변 원고를 써야 했다. 어떻게 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짜깁기를 할까? 그대로 빼길까? 에이~ 문장의 90%를 그대로 쓰고, 말꼬리만 살짝 바꿔서 원고지를 썼다. 이 씨~ 웅변 원고를 써 봤어야지.


다음날 3분 30초짜리 나만의 원고는 선생님 손에 들렸고 웃으셨다.


"은미야 잘했데이~ 6.25에 맞게 요래조래 쪼매만 바꿔보자이~"


나는 선생님의 칭찬만 들었고 나머지 말씀은 다 삼겼다.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그렇게 엉성한 나의 원고는 제출되었다. 원고 통과와 함께 예선전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교무실에 불려 오가는 게 이렇게 신나는 일이 있나?



"은미야 니 웅변해봤나?"


"언지예~ 한 번도 안해봤씸더"


"그러면 이거 우예할끼고?"


"학원 댕길끼가?"


"몬 갑니다.엄마 아버지께는 말씀 안드렸어예"


"그라몬 내거 한 사람 소개해줄낀데 배워볼래?"


"진짜로 예, 무조건 좋씸더"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달렸다. 잠시 후...


교무실엔 그 선배 언니도 있네.


"은미야 인사해라. 니 갈치줄 선배다"



앗~ 심장은 바닥으로 떨어져 주책없이 뛰고 있다. 내 심장소리는 교무실 전체에 울리고 있다.


내가 동경하던 그 트로피의 언니다.


당시 웅변을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웅변학원을 다니던 친구다. 나만 초짜배기였다. 눈에 뭐가 쓰였는지 극내향형인 내가 교무실로 달려가 웅변하겠다고 설치는 지 나도 몰랐다. 매일 심장은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요동치는 소리는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렸고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붙었다 했다. 여고 2년 자그마한 내가 용기를 내고 움직인 첫 번째 도전이다.



그렇게 선배 언니를 처음으로 대면했다.


"현숙아 니 웅변 잘하제. 야가 우리 반인데 니가 잠시 은미 좀 웅변 갈치 줘라. 할 수 있재?"


언니는 웃었다. 그리고 "한번 해보게요"


수업 끝나면 빈 교실서 연습하라고 알려주셨다.


그날 수업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마음은 콩밭에서 웅변 원고를 외우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 앞에서 언니를 만나 빈 교실로 찾아갔다.



"은미라켔재. 너 웅변해 봤나?"


"아니 예 한 번도 안 해봤어 예"


"그라먼 니 처음이 가?"


"예"


"니 용감하네. 그라 먼 일단 저 앞에 서서 해 바라"


난 빈 교실 제일 앞 교탁에 섰다. 그리고 원고지를 펼치고 당당하게 읽기 시작했다. 웅변하는 투로~ 조회시간에 언니가 하던걸 흉내 내며 소리를 질렀다.


"조국이 독립되는 날 나의 비문을 써라~ 이 말은 아일랜드의 유명한 애국자인 제레미아 오도너번 로사가 영국의 식민지하에서..."줄줄줄 외운 대로 소리를 냈다. 이상한 건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선배 언니 앞에서 웅변을 시작하자. 교실 밖을 지나던 친구랑 선후배가 힐끗거리고 교실 안을 쳐다봤다. 부끄러웠다. 그래도 시작한 웅변을 끝까지 다 했다. 교실 가운데 떡하니 앉은 언니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다 들어줬다.



"은미라켔재. 니 웅변해라 목소리가 타고났데 이~ 어데서 배운 거 아이가?"


"아니~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동경하는 언니 앞에서 웅변이란 걸 처음 하는 순간이라는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내 심장은 또 탈출해서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애써 침착했다. 나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입엔 침이 고이고 언니 입만 쳐다보고 있다.



"목소리에는 금성, 수성, 목성.... 나누는데 니는 목소리 자체가 웅변하기에 딱이네. 니 가능성 있데이~"


"잘하네"


난 웃었다. 그다음은 언니가 알려주는 데로 따라서 연습을 이어갔다. 그렇게 언니와 나는 3번을 만났다. 그런데 내가 빈 교실서 혼자 웅변 연습을 할 때면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고3 언니들 반에서 내 소릴 듣고 단체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내 목소리가 밖으로 나가 고3 교실에 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교실 밖을 지나다 좋아하던 고전 선생님과 부딪쳤다.


"은미 너 웅변하나?"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웠다.


"개안타 니 여기서 연습하지 말고 서예실 가서 연습해라 내가 열쇠주꾸마"


고전 선생님은 내가 혼자 연습하는 걸 아시고 열쇠를 주셨다. 서예실은 다른 뚝 떨어진 건물이라 목소리가 밖으로 들릴 일이 없었다. 그날 이후 혼자 연습하러 서예실 묵향과 함께 내 목소리도 조금씩 웅변하던 선배 언니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지금도 모른다. 다만 하고 싶었다. 그래서 했다. 학원 다닐 돈도 없고 학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가난한 살림에 언감생심 학원은 무슨 학원... 내가 혼자 해야 했다. 부끄러움도 낯섦도 모두 사치였다. 난 하고 싶었다 끝까지...


그렇게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올랐다.



부산 ㅇㅇ여고 강당에 전교생이 모였다.


본선에 오른 20명 가까운 선후배가 강당 단상 앞에 앉았다. 강당 1층과 2층에 모인 전교생이 눈앞에 가득이다. 반별로 앉으니 우리 반 친구들이 멀리 보인다. 내 손엔 하도 연습을 해서 너덜거리는 다 외운 원고지가 한 뭉치 들려있다. 옆엔 나의 경쟁자인 선후배가 있다. 교장선생님은 심사위원석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신다. 떠드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시키는 학생주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렇게 1982년 6월 25 "6.25 웅변대회가 시작되었다. 순서대로 한 명씩 소개되었고 웅변대회는 본격적으로 본선전에 올려졌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난 내 순서만 기다렸다. 그렇게 요동치던 심장은 조용히 쉬고 있다. 이상하리 만큼 떨리지 않았다. 담담했다. 멀리 보이는 우리 반 친구들이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까지 전부 눈에 들어왔다.


내 순서다. 내 이름이 불렸고 난 강당 가운데 섰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심사위원석에 인사를 하고 강당에 모인 선후배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무대에 섰다. 원고지를 펼쳤다. 우리 반 친구들이 두 손을 모으고 시계를 들었다. 3분 30초를 알려주려고 신호를 해주는 모습이다.


"조국이 독립되는 날 나의 비문을 써라~~" 그렇게 시작된 나의 원고는 내 목소리로 강당을 울렸다. 중간에 원고가 기억나지 않았다. 순간 내가 말을 만들어 내며 문장을 이어갔다. 이상하다. 왜 안 떨리지?라는 생각을 순간 했던 것 같다. 3분이 지나자 우리 반 친구들이 손을 흔든다. 마무리를 해야 한다. "~~~ 이 연사 큰소리로 외~칩니다~~ 아~~" 그렇게 마무리를 하고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나의 첫 데뷔 무대가 마치자 우리 반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보냈다. 내 눈엔 우리 반만 크게 보였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난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웃음이 나왔다.



심사가 이어지고 장려상부터 이름이 호명된다. 3등, 2등....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마지막 두 명이 앞으로 불려 나갔다. 나랑 다른 친구 둘만 무대 가운데 섰다. 이건 내가 1등 아니면 2등이란 소리잖아.



무대 위에서 둘이 나란히 섰다. 미스코리아 마지막 우승자를 앞으로 나오게 한 것처럼 그렇게 나도 무대에 섰다. 다 보인다. 강당 1층과 2층에 꽉 찬 우리 학교 학생들 중간중간 선생님들이 자기 반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모습까지 다 보인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1등인 거다. 담담하다. 이상하리만큼 난 떨리지 않아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 내 심장이 멈췄다. 그렇게 나대던 심장은 어디로 간 거지?



" 그러면 지금 불리는 호명하는 사람이 1등이고 안 불린 이름은 자동으로 2등인 거 알지요" 마이크를 든 교무주임 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두구 두구 두구~




내일 계속.....




#웅변대회 #첫도전 #심장 #글담코치줄리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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