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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봉투의 상처와 흉터

by 글담쌤


단상에 둘만 남은 시간 교무주임 선생님이 마지막 한마디에 1등과 2등이 결정된다. 멀리 우리 반 아이들이 두 손을 모으고 집중한다. 전교생은 교무주임 선생님의 마지막 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얼른 모든 행사를 끝내고 교실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20명의 웅변하는 소리가 다 듣기 좋았겠냐 싶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나대야 정상인데 너무 담담하다. 근데 욕심이 난다. 처음인데 내가 설마 1등? 근데 1등이면 좋겠다. 그런 맘이 스물거린다. 그때.


"자 마지막 1등만 남았지요. 1등은 2학년 ㅇㅇㅇ!"


그렇게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고 자동 2등이 되었다. 아쉽지도 않았고 떨리지도 않았다. 첫술에 2등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말이지 그게... 좀 아쉽긴 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던 키 큰 트로피는 없었다. 내가 갖고 싶은 트로피가 아니라 상은 종이 상장과 옥편과 영어시전 학용품 꾸리미가 부상으로 주어졌다. 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이다.

영어사전은 집에 있고, 옥편은 잘 찾아보지도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난 트로피가 받고 싶었다. 트로피는 교내 웅변대회에서 받는 게 아니었다. 치이~


그날 상장과 부상을 들고 집으로 왔다. 내가 웅변하는 걸 아무에게도 말을 안 했던 나. 엄마 아버지는 좀 놀라셨다.

엄만 "응? 머꼬? 여식애가 소리 질러 상 받았나?" 그러면서 웃으셨다.

아버진 "잘했네. 그래 여자도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 넘들 앞에서 할 줄 알아야재" 그렇게 우린 그날 저녁 맛난 고기를 먹었다.


동생들은 "언니야 니 또 상 받아 온다 우리 고기 묵게~" 그렇게 즐거운 저녁이 지났다.


웅변대회가 끝나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우리 반에 같이 대회 참석한 ㅇㅇ이가 장려상 받은 기념으로 교무실에 떡을 해서 돌렸다고 했다. 난 떡을 돌린 ㅇㅇ이가 왜? 우리 엄마 아버진 아무것도 안 하는데... 온통 정신이 그리 쏠렸다. ㅇㅇ집은 부자니까. 쌤나고 부러운 맘이 생겼다.


신경이 ㅇㅇ이에게 쏠려있는 그때. 그런데 난 아주 이상한 걸 보았다. 자습시간이다. 우리 반 ㅇㅇ이가 누런 봉투를 들고 가슴에 품고 있다가 뒤로 슬쩍 나가더니 우릴 감독하던 담임선생님께 드리는 거다. 누런 봉투는 얇았고 안에 돈이 들어있었다. 돈이 그대로 비치는 누런 봉투. 내 심장이 바닥으로 흘렀다. 그리곤 거친 바닥에서 가슴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습시간은 심장을 헐게 만들었다.


"뭐지? 저게" 그날 이후 난 열병을 앓았다.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해야 하나? ㅇㅇ이가 선생님께 드린 건 뭘까? 어린 맘에 난 그 누런 봉투를 와이루쓰는 거라 결정지었다. 그리고 못 본 것 본 아이가 되어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니까 교무실에 떡도 못 돌리고 선생님께 봉투도 못 드리나보다 상 받으면 저렇게 하는 거구나. 난 엄마에게 아무 말하지 않고 가슴에 돈 없는 상처를 하나 담았다.


한 달쯤 지났을까 조회시간에 같이 교무주임 선생님은 이번에 학교 대표로 웅변대회 나갈 친구들 이름을 불렀다. 3명이다. 내 이름은 안 불렸다. 1등과 3등 그리고 장려상 받은 우리 반 ㅇㅇ이다. 교실에 들어오자 우리 반 친구들은 왜? 은미 니는 안 나가냐고 한다. 울컥~ 난 그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아니 난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속울음을 삼켰다.


1982년 그날의 상처는 내 일생일대의 가슴앓이 중 하나가 된다. "가난하면 선택에서 밀리는구나. 부모가 되면 자식들 뒤에서 하나하나 신경 써야 되는구나. 와이루 쓰는 거구나."

오랫동안 그 상처는 사는 내내 삶의 어느 부분에서 훅하고 올라와 건드렸다.


혼자 끙끙거리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웅변대횔 간간히 나갔다. 당시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다. 교통과, 안전, 반공, 올림픽대회 홍보 같은 대회가 많았다.


그중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는 대회에 출전했다. 예선과 본선을 거쳐 결선은 부산 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다. 웅변대회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중고등부를 거쳐 마지막 일반부다. 난 혼자 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같이 출전한 웅변가 중에서 이미 아는 친구가 생겼다. 여러 대회엘 나가면 그곳에서 자주 출전하는 동료처럼 아는 친구가 생겼다. 그날도 너무 사람이 많았다. 방송국에서 촬영도 했다. 당시 80년대는 종종 방송에서 웅변하는 영상을 뉴스에 담았다. 단상에서 시원하게 한바탕 소리 지르고 나면 온갖 잡념과 스트레스도 함께 날아갔다. 한풀이 같은 웅변이었다. 자주 웅변을 하면서 자신감과 성취를 맛보기 시작했을 때다. 그러나 아직 커다란 트로피는 받지 못했다.


저녁 무렵 웅변대회 마지막 시상이다. 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 이름이 불렸다. 부산 시장상. 일반부최수상을 받은 거다. 트로피도 받았다. 그날의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혼자 가서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그날 사진사들이 일일이 사진을 찍어서 판매를 해 하나 구입했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다. 다행인 건 그 한풀이 한 상장이 남아있다. 트로피는 피아노 위에서 자랑스럽게 있다가, 여기저기 이사 다니며 깨져서 아주 오래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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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장상을 마지막으로 난 더 이상 웅변대회를 나가지 않았다. 웅변가가 된 이후 난 웅변 학원서 몇 해 동안 아이들을 지도했고 수많은 상을 아이들 품에 안겨주는 역할을 했다. 수많은 지도교사상은 한풀이였고 보람이었고 기쁨이었다. 당시 웅변원고를 써서 받는 돈은 월급보다 많았다. 그렇게 나의 상처는 흐릿해졌다.


결혼 후 상장은 학교생활 때 받든 여러 상장들과 함께 종이박스에 담겼다. 누런 종이박스에 담겨 아파트 베란다 구석에서 몇 년을 묵혀지냈다. 이 아파트 저 아파트로 옮겨겨 다녔다.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짐 꾸러미가 되었다. 아니 전혀 그 박스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내 집을 장만하고 박스를 정리하던 중에 습기 차고 곰팡이 슬어버린 상장 박스를 개봉했다. 실은 뭐가 담겼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베란다 제일 아래에 누런 종이 상자는 베란다 청소하면서 물이 들어가고 말랐다를 반복했다. 베란다 창고는 문이 늘 닫혀있었고 난 박스에 물이 스며든 걸 전혀 몰랐다. 집장만하고 이사 갈려고 창고 문을 열었다가 뜨악~했다.


나의 어린 날 일기장과 바인더 비밀의 상자 상장들이 담긴 박스는 모조리 다 버려야 했다. 관리 소홀이었다. 30년 전 아파트는 지금처럼 환기시설이 좋질 않았다. 내가 그냥 박스째 그냥 제일 아래쪽에 둔 것이 문제였다. 하여간 상장은 버려야 했다. 모조라 다 버리고 이것 하나만 남겨뒀다. 기념으로... 지난번 이사 때 버리려고 빼뒀더니 아들이 발견하고는 "엄마 젊은 날 기억인데 그냥 두세요"라고 한다.


이젠 환기가 잘 되는 뒷베란다 박스에 담긴 상장은 내 어린 날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젠... 버려도 된다. 지금은...


하나 여고 2학년 은미에겐 가난이고 결핍이고 상처다. 어린 날의 내가 본 것이 오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난 내식으로 ㅇㅇ이의 봉투를 교무실 떡을 해석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있다. 모든 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도록 되기까지 슬펐고 우울했다. 상처는 다 나았다. 흉터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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