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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다 Aug 07. 2018

군대가 무슨 인생을 결정짓는 순간도 아니고

무사히 전역하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그르니에는 그의 소설 <섬>에서 “인생이 동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를 알기란 쉽지 않은 듯하다.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해도 이게 운명인지 아닌지 헷갈리거나 모르고 지나치기도 하며, 아마 대부분은 운명처럼 느껴질만한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작은 조짐과 울림을 느꼈다고 해도 “그래 이건 운명이야”라며 받아들이고 변화를 주도하기에는 용기내기 조차 어려운 게 시대의 현실이다.      


더 따지고 들어가면 노력을 한다고 해도 성공이 쉽지 않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어렵다. 물론 나의 부모님은 여전히 내게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일해도 성공은 둘째 치고 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지각 한번 하지 않고, 업무 시간에 땡땡이 치지 않으며, 계속해서 성과를 내는데도 말이다. 야근에 주말까지 일하는데도 (물론 야근수당은 없다) 대출금 빠져나가고 카드값 마저 나가면서 내 통장과 은행은 제로섬 게임을 완성한다. 마이너스 아닌게 어디느냐마는. 월급날마다 느끼는 뿌듯함을 빼면 남은 것이라고는 허무함뿐이다. 아무튼.

   

군대에서 길을 찾고 진로를 구상하며
미래를 그리려는 동생들이 많다


정답은 없다. 오히려 길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래저래 생각은 많지만 그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해보려 해도 사실 군에서는 제약이 있다. 게다가 스무살 남짓 나이가 지닌 생각의 깊이와 넓이도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무언가 결정짓는 행위는 군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군에서 인생의 목표를 찾고 전역 후 그 길을 꾸준히 가는 동생들도 분명 수두룩하게 보았다.


셀럽들을 인터뷰 할 때 군대에 대한 질문을 하면, 항상 마지막 멘트는 “남은 군 생활 건강하게 보내시고, 진로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세요” “군에서의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세요” 뭐 그 정도다. 부대에 가서 잠깐씩 대화를 나눠보면 많은 장병이 취업에 대한 고민이나 자격증 같은 공부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다.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군대는 인생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아니기에 그곳에서 운명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입대사유가 진로탐색이 아니듯, 우리가 인생의 길을 찾기 위해 군대에 간 것은 아니니까. 무사히 전역하기만 해도 그것만으로 큰 공부를 한 셈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여태껏 운명의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운명의 순간이 몇 번 찾아왔음에도 눈치 없이 그냥 떠나 보냈는 지 모른다. 운명적 느낌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빛나는 순간이 아닌 내 주변의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순간은 내 노력이 차곡차곡 쌓였을 때 보인다. 마치 신용카드 포인트나 신교대 상벌점처럼. 노력은 거창한 게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을 모으는 행동이니까.  

   

군대는 하나의 노력이다. 그 안에서의 생활은 작고 좁더라도 깊이는 그리 얕지 않다. 하루하루 그곳에서의 시간을 열심히 알차게 보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지 말라는 건 아니고..) 시간 활용을 잘해서 무엇이라도 하나 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잘못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냥 운동하고 TV보고 멍 때리는 것도 노력이고 경험이며 소중한 자산이다.


군대에서 인생의 길을 찾겠다거나, 하얀 도화지에 미래를 그림 그리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그림은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완성해 나가는 것이지 1년 수개월의 시간 동안 단숨에 그려지는 게 아니다.


군대라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일인데, 뭔가를 또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부담스럽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운명의 일’은 커녕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 맞는지 의심 들 때가 있다. 나아가 앞으로 어떤 새로운 꿈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기도 한다. 전역한 지 십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또 다른 운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그곳에서 운명을 만나지 못했다 하여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2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인생의 중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말자. 얼마나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잖나. 그곳에서 시간을 소비했던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 보이지 않는 인생의 달고 쓴맛을 이미 맛보고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맛의 다양함이 모여 언젠가 결정적 순간을 마주하게 할 것이다. 군대는 인생을 결정짓는 운명적 순간이 아니라 운명을 만나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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