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봄바다는 눈부신 햇살로 나를 반겼다
내 주말 계획에 전남 보성은 없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광주송정역으로 향하는 KTX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서울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빡빡한 출장으로 한 주를 보냈기에 이번 주말은 집에서 쉬고 싶었다. 스케줄이 생각대로 진행된다면 주말 저녁 식사는 집에서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주에 도착하기 전만 해도 나의 생각은 확고했다. 무조건 빨리 일을 끝낸다.
광주에서 보성까지 차로 한 시간 반을 내달렸다. 딱 업무만 보고 서울로 가겠다는 확고한 마음으로 차를 두고 기차를 탔건만, 지인의 솔깃한 제안에 난 보성으로 향했다. ‘진짜 봄을 느낄 수 있어, 그곳에서 꼬막 정식을 먹자’는 말이었다. 흔들렸다. 봄바다에 꼬막이라니. 우와. 진짜 흔들렸다. 지인은 내게 ‘어차피 광주까지 왔는데 온 김에 보성 한 번 보고 올라가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어지간한 말로 설득당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역음식은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결국 나는 보성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챙겨 온 물건도 없다. 워낙 출장이 많은 직업이라 1박 정도는 빈손으로 오더라도 문제없다. (사실 국내에서 신용카드만 하나 있으면 되지 뭘) 광주에 거주하는 지인과 함께 지인의 차를 타고 도착한 보성이었다. 역시 로컬의 제안은 실패하지 않는다. 지인은 광주에 살면서 보성이며 목포, 해남 등을 종종 다니곤 했다. 그중에서도 보성을 선택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내가 요즘 마음이 불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율포해수욕장이 우리가 향하는 곳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녹차밭이 한눈에 보였다. 잠시 차를 세우고 구경을 하기로 했다. (아직 시기가 아니기에) 녹차밭 하면 떠오르는, 그런 초록 빛깔의 무성한 잎은 아니었지만 TV에서만 보던 그 풍경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녹차 밭을 볼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제대로 얻어걸렸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한 때 지리 선생님을 꿈꾸었던 내가 보성의 위치를 헷갈렸다. 전남 보성이 내륙인 줄 착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바다가 있을 줄이야. 남해의 조용한 바다를 가진 도시가 보성이었구나. 보성 율포해수욕장에서 만난 보성의 봄바람은 한 없이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율포와 녹차밭이 보성의 전부는 아니지만,
짧은 시간 보성을 알아가는 꽤 괜찮은 코스였다
보성 율포해수욕장에 민박을 잡았다. 이른 저녁으로 꼬막정식으로 저녁겸 해서 술도 한 잔 할 생각이었다. 해수욕장 근처에 수산시장이 있어 구경도 할 겸 들렀다. 생각보다 꼬막이 많지 않다. 관광객들에게는 아무래도 활어회가 더 인기인 모양이다. 특이한 점은 장어와 관자가 눈에 주로 띄었다. 갯벌이 있는 곳이어서 그럴까. 키조개와 가리비도 보였다.
갑자기 ‘관자’가 나를 당겼다. 지인도 비슷한 눈치다. 꼬막을 먹겠다고 보성에 왔지만 생각이 바뀌니 굳이 꼬막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장어와 관자를 각각 한 팩씩 샀다. 장어 한 팩은 한 마리 반이라고 했다. 두툼한 관자는 상당히 매력적인 비주얼이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게 지인과 회포를 푸는 술상에는 꼬막 대신 장어구이와 관자구이가 주인공으로 올라왔다. 물론 저녁식사는 성공이었다. 결코 실패할 수 없는 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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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혹은 친한 친구들과 남쪽 지방에 갈 일이 있다면 일부러라도 다시 찾고 싶다. 갯벌에서 잡아 올린 싱싱하면서 실한 이 맛을 잊을 수 없다. 이 맛을 나누고 싶다. 특히 그 분위기를 알려주고 싶다. 3월 말이라 아직은 쌀쌀한 밤바다지만 봄이 오는 싸늘함에는 알듯 말듯한 반가움이 있다. 잔잔한 바다 위 빛나는 별이 그걸 말해준다. 보성은 그런 곳이다.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라왔지만 후회되지 않는다.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지만 몸은 오히려 가득 충전한 것 같다. 갯벌의 힘일까. 봄을 먼저 느낀 바다 때문일까. 오랜만에 지인과의 술자리 때문일까. 그 모든 이유들이 결국 보성으로 연결된다. 그 지인과 두고두고 이야기할 것 같다. 우리의 봄, 보성에서 나눈 시간을 말이다.